하다 하다 생 소시지까지 먹었다는 누명까지
우리가 이사한 집의 렌트비가 높아졌다.
집의 사이즈가 조금 더 커진 것만큼 우리의 부담은 높아졌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돈이야 남편과 내가 조금 더 움직여서 벌고 아이들과 우리 가족의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 없으니 겁내지도 않겠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육체의 고단함을 이긴다는 것을 뉴질랜드 와서 처음 느꼈다. 비자가 말썽을 일으키고, 갑자기 살던 집에서 퇴거통보를 받고 이 모든 것이 일 년도 안된 해외살이를 하며 내 심장을 바짝 말려놨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놓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
이민병에 걸린 남편 때문에 뉴질랜드 해외살이가 시작됐지만 살고 보니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삶에 서서히 물들어 간다.
단 한 곳, 내가 일하는 빵 집 만 빼고.
일 시작시간은 10시, 도착시간은 9시 56분. 빵집에 들어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3분 만에 앞치마를 입고 내가 할 일을 시작해도 사모님은 늦었다고 성화다. 오버 타임에 대한 내 노동값을 돈으로 환산해 주는 것이 끝내 못마땅한 사모님 때문에 오버타임을 한 만큼 다음날 늦게 나갔지만 이것도 당연시되어 매일 출퇴근시간이 20분, 35분, 10분 고무줄처럼 왔다 갔다 한다. 아이들이 개학을 해서도 출퇴근 시간을 그녀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니 그마저도 불합리해 정시에 퇴근하겠다 말했다.
10시부터 2시. 일하는 내내 물 한 모금 안 마신다. 빵집에는 정수기가 없어 집에서 물 한 병을 가지고 나가지만 잠깐 서서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물병을 놓는 곳도 마땅찮아 작업대 윗 찬장에 놓아두지만 일을 시작하면 그곳에까지 갈 30초의 시간도 내겐 없다. 그렇다고 무겁게 물병을 앞치마 앞주머니에 넣어둘 순 없으니 목마를 땐 작은 캔디를 하나 입에 넣는다. 일 시작하고 2시간쯤 뒤에 앞치마 앞주머니에 휴대폰과 함께 미리 챙겨 둔 작은 민트 캔디를 하나 입에 넣으면 아무 말 않고 계속 일만 하는 내 몸에 잠시나마 숨통이 트인다. 하루에 이클립스 민트향 캔디 두 개면 빵집의 일이 버텨진다.
아무리 최저시급이라 하더라도 남의 돈 벌기 쉽지 않지. 그래서 더 움직이고 알아서 일을 찾아 했다. 설거지 감을 찾아 하다, 주변 작업대를 청소했다. 그러다 손님이 없을 때는 홀로 나가서 테이블과 의자 주변을 닦고 바닥을 쓸고 날파리가 잔뜩 끼어있는 케이크 케이스를 닦았다. 빵 선반들과 보관 케이스를 싹 걷어와 매일 씻어 말려놓고 닦아서 다시 빵을 진열하면 빵을 사가는 손님들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았다.
빵집의 큰 냉장고에는 치즈와 우유, 버터, 소시지, 생크림과 커스터드 크림 등 각종 크림류를 만들어 보관한다. 냉장고에는 사장님과 사모님, 케이크언니가 수시로 드나들다 보니 조금씩 흘려놓은 부스러기와 크림과 우유들이 말라 붙어있어 위생상 좋지도 않고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유제품 냄새도 심하게 나서 하루는 냉장고에 들어가서 미끌거리고 진득해진 액체와 고체사이의 오염물들을 닦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크림을 냉장고에 넣으러 온 사모님이 아무 말도 않고 나가시길래 싱크대 앞에 있지 않는 나를 찾으러 온 건가 싶었지만 이내 잔소리 없이 나가는 사모님의 뒷모습에 나도 신경 쓰지 않고 남은 오물들을 닦아내고 냉장고 밖으로 나갔다.
손이 빠른 나에게 설거지와 청소만 시키긴 아까웠는지 사모님은 '승진'이라며 생크림 만드는 일, 식혀 둔 빵을 갈라 크림을 바르는 일, 피자빵의 최종단계인 케첩, 마요네즈, 허니머스터드소스를 지그재그로 뿌려 내는 일들을 추가로 맡겼다. 특별할 것 없는 일에 승진 이란 단어를 붙여 더 책임감 있게 해 주길 바랐지만 이미 빵집의 위생과 손님을 위한 서비스까지 시키지도 않은 궂은일을 다 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주인의식은 사모님보다 내가 더 있지 않았을까.
작업대 위에 소시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사모님은 그 소시지를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빼고 몇 번째 말렸다 쓰는지 모를 키친타월에 물기를 닦아 피자빵 재료로 쓴다. 오늘도 냉장고 청소를 마치고 싱크대로 돌아와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는데 사모님이 소시지가 감싸져 있는 키친타월을 펼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한다.
사모님: 소시지 먹었어요?
나: 네?
사모님: 여기 있는 소시지 먹었냐고요!!
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 소시지를 왜 먹어요?
사모님: 그럼 이 소시지 하나가 왜 절반 밖에 없어요?
나: 모르죠. 제가 안 먹었어요.
사모님: 점심도 안 먹고 일하니까 배고파서 먹은 거 아니에요?
나: 제가 무슨 돼지도 아니고 익히지도 않은 그런 걸 왜 먹어요?
사모님: 그럼 지금 오물거리는 건 뭐예요??
나: 네? 제가 집에서 가져온 민트사탕인데 보여드려요?(앞치마 앞주머니에서 이클립스 통을 꺼내 보여준다)
사모님: 그럼 이 소시지 반이 어디 간 거야? 진짜 안 먹은 거 맞아요?
나: 그만하시죠.
사모님: 그럼 왜 그렇게 냉장고에 오래 있다 나온 거야?
나: 청소했죠. 사모님이 직접 들어가셔서 제가 뭘 했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
내가 냉장고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리고 손이 시려도 닦아댔던 그 층층의 선반에서는 광택이 났고 하루만 지나도 생크림과 버터로 미끌거리는 바닥은 더 이상 미끄럽지 않았다.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나던 우유 썩는 냄새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녀는 모를 수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작업장 옆의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우유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고 투덜대던 사람이다. 버터크림에 손가락이 닿으면 냉장고 선반에 쓱 닦아 손자국을 그대로 남기던 사람이다. 버터를 흘린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져 뼈가 부러질까 겁이 난다고 닦을 생각은 안 하고 박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를 밟고 다니던 사람이다.
세상에.
그녀는 매일 냉장고 속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가는 나를 빵집의 곳간을 털러 가는 도둑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내 행동을 감시하듯 냉장고에 왔다 갔다 했나 보다.
나는 4시간의 노동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환기시키지 않는 빵집에서 오븐의 열기에 목마르고 어지러울 때쯤 먹는 민트 사탕 두 개가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는데 오늘은 내 입의 오물거림까지 의심했다. 입까지 벌려 보여줬어야 했나.
10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 없이 심지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일하니 냉장고에 들어가서 몰래 생소시지라도 훔쳐먹었을 거라고 의심한 사모님의 생각은 가히 놀랍기 그지없다.
꽈배기의 한쪽면을 좀 더 튀겨 색이 달라졌으니 팔 수 없다며 책임지라던 사모님의 말에 선한 얼굴의 꽈배기 언니는 관뒀고, 사장님과 사모님의 부부싸움을 중재하다 자신의 남편에게 꼬리 친 여자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배려심 깊은 단발머리 언니도 관뒀다. 그리고 나는 오늘 소시지를 훔쳐먹은 도둑으로 의심 받았다. 하지만 관두지 않을 것이다.
나를 가난한 게 보고 빵집의 아르바이트 일을 허락했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점심시간을 넘겨 일하다 배고파 냉장고 속 생소시지를 훔쳐먹었을 거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 오해가 지속되도록, 없어져버린 소시지 반쪽의 행방이 궁금해 미치도록,
나는 그녀의 눈에 가시가 되어 오래오래 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