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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by 청와

한강의 <서시>, 죽는 날까지 당신의 뺨에 얼룩진
- 부사를 '눈여겨' 보다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1)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2)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3)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4)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구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5)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31-133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적어놓았습니다.

[몸말로 읽기]

1. 조용히 그리고 오래

1)에서 운명이 시적 자아에게 묻는다는 가정적 질문은, 사실은 시적 자아가 자기의 운명을 직시하게 될 자기-자신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자기의 운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기서 하려는 얘기는, 질문에 대해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냐는 겁니다.

대답 대신 '조용히'라고 했네요. 대답보다 물음이 더 소중한 겁니다. 물음이 없이는 대답도 없습니다. 진정한 물음을 묻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물음에 답을 찾는 일은 오래 오래 두고두고 해나가야 하는 겁니다. 이 ‘오래’에 대해서는 5)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운명’이라고 한 것은 일단 ‘자기-자신이 살아야했던, 살아야하는 삶’이라고 해두자고요. 그 삶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사건, 희비와 고락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이루어온 인연들입니다. 그 인연들이 그저 쌓이기만 해서는 자기-자신의 양적인 성장과 성숙에 불과합니다. 자기-자신을 새롭게 거듭나도록 하는 것은 그 인연들을 곰삭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때 자기-자신이 고치를 벗고서 우화(羽化)하는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고치가 우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 오래 있을 거야.’

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2. 잘

결국 자기-자신의 삶을 곰삭혀 새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 곰삭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내면의 상태를 미리 떠올려 봅니다. 눈물과 웃음으로 지나온 삶에 감정이 이입되기도 하겠고, 아련한 추억처럼 되새겨지면서 이미 새 삶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다림일 수도 있겠습니다. 회한도 애증도 모두 그 과정에 필요한 효소들입니다.


그 곰삭힘을 '앓음다움'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의 미숙한 자기 자신을 품어 줄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과 더불어 걸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인연이든 묵묵히 품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음다움'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의도대로만은 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인 존재의 깊이를 다 알았다 하는 것은 설익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곰삭은 사람일수록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앎에 있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알음다움'이라 하고, 겸손을 '모름지기 모듬다움을 지킨다'라고 합니다.


답은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알움다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대단한 답,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알함다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3. 가끔 그렇지만 언제나

일단 ‘자기-자신이 살아야했던, 살아야하는 삶’이라고 해둔, ‘운명’을 가끔 느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은 느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삶에 대한 절실한 느낌의 순간들이 ‘가끔’ 있기도 했겠지만, 사실은 매 순간 ‘언제나’ 그 ‘운명’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었다는 깨달음(앎, 통찰)이 오게 되는 겁니다.


'가끔'은 자각의 순간이고, '언제나'는 무의식적 동행입니다. 매 순간은 별과 별의 충돌의 순간입니다. 폭발로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지, 매 순간은 존재의 꼴림들이 서로 맞닿는 순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쓰는 운명이라는 말에는 과부하가 걸려있습니다. 깨달음만큼.


매 순간이 운명의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인 것을.

4. 때로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자신과 그 자기-자신을 만나는 지금의 자기-자신은 결국 하나면서 둘입니다. 무수히 많은 지금의 자기-자신이 이루어온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자신은, 윤동주의 <자화상>에서처럼, 그리워하다가 미워지고, 미워졌다가도 다시 그리워지는 곰삭히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때로’는 그리워지고, ‘때로’는 미워지고, 어쩌다 ‘때로’는 생각도 나겠지마는...

5. 마침내 그것은 오래

<서시(序詩)>란, 첫머리에 놓이는 시입니다. 첫머리에 얹는 시에 시작(始作)과 종국(終局)을 함께 담았습니다. 그것이 5)에서 말하고 있는 ‘마침내’입니다. 그런데 그 ‘마침내’의 모습은 ‘오래’입니다.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겁니다.

어떤 과정인가요? 오래는 긴 시간입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말하는 걸까요? 자기-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은 자기-자신의 한 평생입니다. 그것을 저는 ‘영원(永遠)’이라고 합니다. ‘영원히’라는 말은 ‘한 평생을 다해서’라는 말입니다.

‘자기-자신이 살아야했던, 살아야하는 삶’에 대해, 사람마다 다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반응할 겁니다. 빛과 그늘이 있는 그 삶에 대해,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에서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 연속되는 삶의 매 과정이 ‘마침내’ 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오래’ 그 ‘뺨에, / 얼룩진’ 삶들을, 운명들을, 눈물들을, 피들을, 땀들을 다시 만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나도록...

6. 죽는 날까지 당신의 뺨에 얼룩진

삶이 운명인 겁니다. ‘자기-자신이 살아야했던, 살아야하는 삶’이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삶은 내인(內因)과 외연(外緣)의 교직으로 짜 나가는 인연입니다.

삶이 주어지고, 살아지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우연과 필연의 결과물인 ‘주어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삶은 자기-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그것은 매 순간 자기-자신의 선택에 의해 ‘창조되는 운명’이 되는 겁니다. 저는 그 주어진 운명이면서 창조적인 운명이기도 한 삶을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운명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매 순간이 ‘무한한 가능성이 창조적으로 발현되는 운명적 순간’입니다.

조셉 캠벨이라는 신화학자의 <신화의 힘>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고려원, 1992, 235쪽.)

조셉 캠벨의 말은, 내세적 천국을 현세적 천복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제 해석을 덧보태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알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내서 선택한 삶을 사는 사람은 순간순간의 고락, 희비, 행불행, 복과 화에 이끌리지 않는 ‘천복(天福)’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깊은 내면의 소리(윤동주의 <십자가>의 ‘종소리’)를 듣게 되는 거지요.

그것이 새 삶으로 거듭나는 삶입니다. 오래 오래 삶의 순간들을 곰삭혀서 천복의 삶을 살기까지, 자기-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빛과 그늘, 얼룩이 자기-자신을 천복의 삶으로 인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 '오래'는 '영원'이고,

그 '조용히'는 '사랑'이며,

그 '얼룩'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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