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2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오늘은 내가 쓴 시 한 편 올리면서 얘기해 보려네.
不然其然 불연기연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父之父之知不知 부지부지지부지
知之不知知止也 지지부지지지야
做作浮言信不信 주작불언신불신
採理之本至氣也 채리지본지기야
불연이 기연일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아는가 모르는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데서 그칠 줄 알아야지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어 믿느니 안 믿느니
이치의 근본을 캐보니 생명이로세.
제목 '불연기연(不然其然)'은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실려있는 논설일세. 긴 얘기는 뒤로 미룸세.
부지부지(父之父之)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말인데,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도 만날 수 없고, 건널 수 없는 강을 비약해야 만날 수 있는 초월자를 말하는 것일세.
지지부지(知之不知)는, <논어>의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에서 온 말일세.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말이라네. 인식론적 태도에 있어 이만큼 '모름다움'을 설파한 이가 공자 외에 또 있을까 싶으이. 참으로 '알음다운' '알아감'의 자세일세.
수운 선생님이 기(氣)를 일러 지기(至氣)라고 한 것을 나는 '생명'이라는 말로 쓰고 있네.
2.2.1. 수운의 불연기연
도올 선생님은 '불연기연'에 대해 탁월한 해설을 해주었네. '불연기연'을 '불연과 기연'이라고 해석하여, 불연을 초월적인 영역으로, 기연을 경험적인 영역으로 보면 이원론이 되네. '서학(西學)'은 필시 불연과 기연을 이원론으로 설정하고 있네.
이에 대해 수운은 서학의 이원론을 철저히 부정하는 논설을 썼다네. '불연이 기연이다'라고 해석해야 수운의 본뜻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거라네.
신이한 세계도 결국 알고 보면 그러저러한 것으로 다 설명이 된다는 말일세. 불가사의하던 불연의 세계를 결국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연의 세계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걸세.
<不知不然, 故不曰不然, 乃知其然, 故乃恃其然者也. 於是而揣其末, 究其本, 卽物爲物, 理爲理之大業, 幾遠矣哉.>
(우리는 불연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불연을 말하지 않고, 기연은 알기에 기연에 의지하게 된다. 기연의 말단으로부터 헤아려서 그 근본을 탐구하게 되면, 곧 사물이 사물이 되고 이치가 이치가 되는 대업이 어찌 이루어질 수 없는 요원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
- 최제우, 불연기연, 동경대전
'부지불연', 불연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그러니 '불왈불연', 불연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인식론적 아름다움을 나는 '모름다운' 알음다움이라 한다네. 얼마나 아름다운가?
'췌기말', 내가 할 수 있는 근사한 삶의 이치를 헤아려보는 것으로부터, '구기본', 삶의 근본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면, 불연의 세계라고 여겼던 불가사의한 것들이 스스로 그러그러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라 하니, 그 얼마나 알음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2.2.2. 청와의 불연기연
수운과 그의 시대는 서학에 대해 성리학(理學)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 박해를 가하던 때였다네. 나는, '서학이나 이학(理學)이나 모두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무리들의 대립이었다'고 보네.
수운은 필시 이학과 서학에 맞서 동학의 세계관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에, '불연기연'이라는 논설로 서학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라 보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중세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신봉하는 자들이 태반이로세. 하여 아직은 '불연기연'을 수운이 논설한 대로 '불연'에 대한 해석을 '초월적 세계'로 볼 수 있지만, 이제 '불연기연'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일세.
'기연'은 석연(釋然)한 인식과정을 이르는 것으로, 불연은 석연치 않은 인식과정을 일컫는 것으로 '불연기연'을 보자는 것이네. 어차피 초월적인 영역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 세계관, 그 믿음을 가만히 순순히 버리려들지는 않을 거라는 말일세.
다시 말하면,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거나, 일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거나, 기말(其末), 그 말단의 한 마디(개념)에서부터 기본(其本), 그 근본적인 이치에 이르기까지 석연치 않은 것들은 스스로 찾아내어 폐기하고, 석연함에 이를 수 있는 사고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일세. 스스로 못하면 옆에서 친절하게 해주면 좋지 않겠나?
근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모습이, 중고대인들이 알음답게 생각한 보람을 이어받지 못한 죄 또한 크다는 걸세.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인식론적 확장을 우주론적으로 펼친 혜강 최한기의 작업을 한 번 더 이야기하고 나서, 친애하는 벗 세훈이 간추린 <현자들의 죽음>이라는 책 속의 '인식내용'에 대해 내 생각을 이야기하려 하네.
두 번째 편지는 여기까지라네. 밤이 많이 깊었네. 조만간 또 보세.
2025년 2월 27일 꽤 늦은 밤에
청와 박수경 醉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