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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4

by 청와

머리말이 길어졌네. 이미 느꼈을 테지만 머리말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졸가리는 다 들어있는 셈이라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여졸가리에 불과할 수도 있네.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 윤회는 끊임없이 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인가? 아니다. 영사다. 영사? 영원히 죽는다는 뜻이다. 죽고 나고 다시 또 죽고 나고 죽고 나고.... 그렇다면 모든 생은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삶을 마친 다음, 육체는 원자들로 흩어지지만 의식의 흐름, 특히 그 가운데 카르마(신구의)는 남아 계속 다시 이 삶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자네가 간추려서 제시한 내용, 두 곳의 탈자는 내가 끼워넣었네.)


책에 어찌 기술되어 있는지 모르겠네만, 자네가 정리해 놓은 내용일세. 이걸 바탕으로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네.


3.1.1. '누가 뭐라 하더라'를 넘어서


자네가 제시한 내용을 보면, 책 내용을 옮겨놓은 부분과 자네가 덧붙인 부분이 섞여있는 것 같으이. 어쨌든, 책 내용에 대해 이해(인식)하려 하면서, 자네 스스로 문답을 통해서 결론을 얻어가는 방법이 마음에 들었네. 물음이 학문의 출발이랄 수 있겠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요긴하네.


첫 문장 : 윤회는 생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 : 삶을 마친 다음, 육체는 원자들로 흩어지지만 의식의 흐름, 특히 그 가운데 카르마(신구의)는 남아 계속 다시 이 삶으로 되돌아온다는 것.


첫 문장을 얘기한 사람이 누구였건 간에 저 문장을 쓴 사람에게 수없이 많은 물음을 물을 수 있다네.


생을 반복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개도 주체가 되는가? 개도 주체가 된다면 개는 무슨 업을 가지고 이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개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는 뭔가? 개미는? 하루살이는? 뱃속에서 유산된 아이는?


불연(不然)하다는 걸세. 석연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세. 그나마 그것을 기연(其然)의 방식으로 풀고 있는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네.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의 일종으로,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을 자유연상 작용을 통해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두고 하는 말일세. 심리학의 용어라 해도, '사람의 정신 활동에서, 생각과 의식이 끊이지 않고 연속되는 것'을 말하네. 여기서는 뭐라는 건가?


'특히 그 가운데 카르마(신구의)는 남아'라고 했는데, '의식의 흐름' 전체가 남는 건가? 카르마(신구의)만 남는 건가? 육체가 흩어지는 것은 기연의 사실인데, 카르마가 남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어디에 어떻게 남는다는 말인가? 카르마가 의지할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이런 게 모두 불연일세.


왜 이런 물음이 해결되지 않는가? 불연과 기연의 이원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일세. 내가 물은 물음들은 '췌기말'(누군가의 말에 대해 말꼬투리를 잡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 말단에 대해 미루어보는 것)일세. 일단 말단에서부터 미루어지지(느껴지지) 않는다는 걸세.


왜 그런가? 그것은 누군가 실제로 겪은 바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누군가 삶과 죽음에 대해 미루어보고, 이원론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헤아려본 생각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네.


'누가 뭐라더라'에 대해 물음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말한 근본 이치가 무엇인가까지 캐고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 내 바탕에는 어떤 근본 이치가 놓여있는지 들여다 보아야 하네.


그것이 싯다르타께서 '자등명 법등명'이라 하신 눈물 겨운 말씀의 참뜻이라고 나는 본다네.


3.1.2.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3.1.2.1. 역사적 추기측리


업(카르마)과 윤회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전통사상 가운데 하나라네.


깨달은 싯다르타가 윤회라는 미혹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코치하는 입장에서, 단계적으로 처음에는 윤회를 인정하면서 중생을 가르치는 설법을 하셨다는 게지. 불교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 들어오면서 기존에 퍼져있는 무속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될 걸세.


즉 싯다르타 입장에서 보면, 윤회는 포교를 위한 한 방편설법이었다는 거지. 그것을 싯다르타 사후에 교단이 전폭적인 포교 주력 상품으로 만들었다고 본다네.


불교 포교의 양대 주력 상품이 윤회론와 천당지옥론이라네. 요즘은 불복(佛福, 부처님이 복을 준다는 타력 신앙에 기복신앙이 덧씌워진 히트상품)이라는 상품이 더 인기가 있는 상품일세.


불제자들이 못 마땅해 해도 할 수 없다네. 예수제자들 얘기는 차마 입에 담기도 참담해진다네. 그나마 내 사랑이 들어있는 고언(苦言)이라 여겨주게나.


3.1.2.2. 이치적 추기측리


3.1.2.2.1. 업보와 윤회


'업보'라는 말은 '업'으로 인한 '보'가 있다는 말일세. 살아서 생각하고(思, 意業) 말하고(言, 口業) 행한(行, 身業) 모든 것을, 선업과 악업, 이도 저도 아닌 무기(無記)로 구분해서,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생을 받는다는 걸세.


누가 그런 법(法)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서학에서는 '야훼'라고 하는 귀신(鬼神)이 그런 법을 정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법을 제정한 자가 확실하다네. 법도 확실하다네. '믿느냐 안 믿느냐'.


재판이야 염라대왕이든 옥황상제든 허수아비를 내세워 행하게 하면 되겠지만, 입법부터 절차적 문제가 있다는 걸세. 법 마저도 두루뭉수리 대충 만들어 놓았다네. 법에 선과 악을 규정해 놓지도 않고, 선악을 죽은 뒤에 판별하겠다고 하니, 그 선악의 문제가 중세 이후에 제기된 것 아니겠는가? 조선의 '인물성동이논쟁'이 그 선악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는 걸세. 이 선악의 문제는 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해야할 중대한 문제일세. 여기까지.


싯다르타가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네. 윤회와 업보를 한 데 얽어놓음으로써, 현세의 상하, 성속, 남녀, 안밖, 중변(中邊)의 이분법적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생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선악의 사슬로 옭아맨 것이지 않겠는가 라고 추측해보는 거라네.


누가? 누구겠는가? 상(上)과 성(聖)과 남(男)과 기득권 중심의 동료패거리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이용한 것이 뭐였겠는가? 불연의 세계라네. 결국 불연과 기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봉사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힘없는 중생을 이용하는 데 쓰이는 것이고, 기득권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쓰였던 것이라는 걸세.


3.1.2.2.2. 무아와 윤회


싯다르타께서 설한 법(다르마)을 한 마디로 말할 수야 있겠는가마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으니 그 이치를 가져와서 얘기해 보려네.


님만 님이라, 똥만 똥이라 해서는 님도 똥도 알 수 없다는 거네. 님이라는 상을 지어봐야, 똥이라는 상(相)을 지어봐야, 상일뿐, 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 라고 하는 걸세.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지어봐야, 그것은 오온(五蘊)이 연기해서 지어낸 가합(假合)일 뿐이라는 걸세. 곧 연기가 공(空)하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제법무아라는 걸세.


이치가 그러한데, 여기에 윤회가 끼어들 바늘 틈바귀가 어디에 있겠는가? '없는 무엇'이 남고, '없는 무엇'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말인가?


불교의 윤회는 애초부터 역사적으로 부정되어야 했던 의붓자식일세. 끌어안고 껴안고 갈 수밖에 없었던 초기 불교의 가장 아픈 새끼 손가락이 자라서 이제는 엄지 손가락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세.


성숙한 불교인이라면 윤회를 독립시켜 내보내주고, 열반과 해탈을 향한 길은 싯다르타의 가르침에서 찾아 깨닫기를 바라네.


自燈明 스스로 등불을 밝히고
自歸依 자기에게 의지하라
法燈明 법으로 등불을 밝히고
法歸依 법에 의지하라


싯다르타께서 열반에 드시며 '자등명 법등명'하라 일러 주시지 않으셨던가?


추신, 윤회에 대한 내 생각과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남았네.


땅거미 지고 갈 곳도 없으니

술 한 잔 앞에 놓여있거든

술아일체된 뒤에

무아지경에 들거든

그 때 또 봄세

2025년 2월 28일

청와 박수경 謙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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