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6
오늘은 열반에 관한 이야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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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열반, 그 높은 곳을 향하여
3.3.1. 싯다르타의 길
싯다르타께서 출가를 하시어, 깨달음을 얻으시고 열반에 드셨다니, 그 길을 짧게 되짚어 보려네.
출가(出家)는 카필라성의 세속적인 삶을 떠나서 구도(求道)-수행(修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네. 싯다르타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으로 출가를 했다네.
출가를 해서 얻은 깨달음이 초전법륜을 통해서 가르치신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라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심을 했으니, 중생이 괴로워하는 원인이 무엇이고, 그래서 그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거라네. 짧은 얘기가 아니네만, 짧게 얘기해 봄세.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 미혹 또는 번뇌라 해도 무방)’이라는 걸세. 자성(自性)이 없이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일세. ‘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일세. 그 ‘나’가 집착하는 삶이 모두 덧없고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일세. 그와 같은 ‘이치’를 모르는 무지(無明)로 인해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는 거지.
그러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을 해결해야 하네.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을 밝히는 것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구도의 과정이라네.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가 쌓아온 태산 같은 ‘업’이 있기에 그 업을 멸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여덟 가지 방도인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해야 한다는 걸세.
깨달음과 수행, 나중에 돈오점수니 돈오돈수니 하는 논쟁을 낳은 싯다르타의 두 가르침일세. 싯다르타께서 깨달음과 수행의 길을 통해 열반에 드셨으니, 모든 중생이 또한 그와 같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걸세. 열반(涅槃)은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번뇌 무명 미혹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네. 불이란 흔히 탐진치(貪瞋痴) 삼독을 말하네.
싯다르타께서 이른(경지에 도달한, 말씀하신) 곳이 어디인가? 열반의 경지라네. 싯다르타는 죽어서의 열반이 아니라, 살아서 열반에 드셨다네.
3.3.2. 중생의 길
<죽음을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삶의 길로 생각하고 평안하게 맞기 위해서 삶을 행복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러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벗어난 니르바나의 세계로 좀 더 접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부처님과 사리자가 행한 무여열반의 세계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말자. 죽음도 우리의 삶의 하나이다.>
자네가 <현자들의 죽음>을 읽고 내린 최종적인 결론부분일세. 자네가 도달한 결론에 대해 이견(異見)은 없네. 다만 보충적인 생각이 들기는 한다네. 결론을 확충해 보자는 걸세. 그 보충적인 생각을 <중생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 덧붙이려 하네.
나 같은 ‘중생’이 싯다르타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중생이 하는 짓이 다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시게.
3.3.2.1. 중생에게 출가라 함은?
출가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네. 싯다르타의 출가에서, 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게 요점이 아니라, 발심(發心)을 했느냐 하는 게 요점이라네. 싯다르타의 발심은 자기-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위대한 발심이었다네. 얼마나 ‘안음다운’ 출가인가?
지금까지의 자기 삶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제까지처럼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네. 그러나 싯다르타를 통해서 느꼈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돌이켜보아 느꼈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다면, ‘이제 다시’ 새롭게 삶을 살아야겠다는 ‘발심’이 필요하다는 걸세. 그것이 출가라는 거지. 수운 선생님은 그것을 <각비(覺非)>라고 하셨다네. ‘앓음다운’ 발심을 해보자는 걸세. 아픔(괴로움)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을 ‘앓음다움’이라고 한다네.
3.3.2.2. 일체개고라 함은?
싯다르타께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여, 생로병사,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모든 것이 다 괴로움이라고 했네.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부정적인 전제 위에 놓이게 된다네. 삶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으니 나날이의 일상의 삶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무명으로 인해 어리석은 중생인 나로서는, 굳이 삶 전체를, 하나하나 샅샅이 다 괴로움이라고 전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네. 싯다르타께서 삶의 근본적인 상태로 진단한 ‘괴로움’을, 나는 그저 삶의 근본적인 두 느낌 가운데 한 양태로 본다네. 즐거움과 괴로움이 삶의 근본적인 느낌의 두 양태라고 본다네.
그 둘은 음의 느낌과 양의 느낌으로, 음양이 서로 생성-극복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네. 나는 기일원론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이 음양이 생성-극복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네. 괴로움 속에 즐거움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앓음다움’이라는 거듭남이라네. 즐거움 속에 괴로움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모름다움’이라는 ‘음양이 생극하는 이치’일세. 음양이 생극하는 이치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극하는 이치를 더 깊이 깨달아 가보자는 걸세.
괴로움의 원인을 자기신명과 주어진 여건의 관계로 ‘다시’ 생각을 해본다네. 자기신명이란, ‘자기 영혼의 의지’랄 수 있는 건데, 혜강 선생님은 ‘신기(神氣)’라 했고, 수운 선생님은 ‘지기(至氣, 그것이 수운의 하느님일세)’라 했고, 녹문 임성주는 ‘생의(生意)’라 했고, 나는 ‘신명’ 또는 ‘영혼’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네. 더 깊은 논의는 뒤로 미룸세.
자기신명대로 살면서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을 ‘흥(興)’이라 한다네. 자기신명대로 사는 것을 ‘삶을 누린다’고 한다네. 그렇게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을 신명풀이라 한다네. 자기의 신명풀이를 넘어 집단적 신명풀이로, 민족을 넘어 인류로, 인류를 넘어 온갖 중생으로 신명풀이가 확충되는 걸세. 그래서 삶이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네. 누구나 자기 삶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선(善)한 삶, 잘 사는 삶’이라네.
자기신명이 주어진 여건에 의해 풀리지 못하고 맺히고 꼬이고 응어리진 것을 ‘한(恨)’이라 한다네. 자기신명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한(餘恨, 寃恨), 남의 신명에 의해 생기는 한(怨恨), 온갖 신명들의 한을 내 문제로 여기는 데서 오는 한(衆生恨) 등이 내가 일원론적 생극론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한’일세. 한이 근본적으로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생기는 한을 어찌 풀어가야 하겠는가 라는 물음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는 걸세.
3.3.2.3. 열반이라 함은?
삶의 근본적 문제였던 ‘괴로움’을, 삶의 실천적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세. 싯다르타의 깨달음, 괴로움의 원인이 무명(번뇌, 미혹)에 있다는 깨달음은 원천적으로 유효하다네. 싯다르타께서 6년 동안 구도자로서, 수행자로서 깨달은 또 하나의 원리가, 고행과 선정의 수행 과정에서 깨달은 ‘중도(中道)’라는 것일세.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일원론적인 세계관에서도 극단주의로 나타난다네.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일원론일지라도 결국 이원론과 다를 바 없는 세계관이라네. 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인식과 실천의 바탕에 두고 있기에, 기의 음양생극론은 결국 중도론(中道論)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네. 그것을 ‘중용(中庸)’이라 하든, ‘시중(時中)’이라 하든,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 하든, 생물학의 용어로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라 하든 관계없다네.
극단적인 선택은 극단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써야지, 일상에 극단이 들어와서는 결국 그것이 이원론적 세계관이 된다는 걸세. 불선(不善)을 넘어선 남의 생명을 유린하는 악행에 대해서는 극단적 방어를 넘어서는 극단적 필요악도 어쩔 수 없다는 걸세. 이것은 선악이 따로 존재한다는 존재의 이원론이 아닐세. 삶을 누리는 행위가 선이고, 그렇지 못한 행위가 불선이고, 그렇게 못하도록 하는 행위가 악행이라는 행위의 윤리적 문제일 뿐일세.
중도로 돌아가 보세. 우매-무지-몽매와 열반-깨달음-해탈이 양 극단이라고 해보세. 우매하게 살면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깨우쳐야 마땅한 걸세. 어디까지? 열반(涅槃)이 산수 문제 푸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뚝딱 이루어질 수 있는 거라면, 모두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걸세. 그런데 우매-무지-몽매를 모두 몰아내고 모든 번뇌를 멸해서 삶이 적정(寂靜)한 데에 이르러야 하는 거라면, 목표로서야 훌륭하네만, 모든 중생이 다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걸세. 그래서 불교에서도 근기(根機)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발심(發心)이 중요하다고 한 걸세. 열반이라는 그 높은 곳에 모두 다 올라가야 하는 건가? 높은 것이 제일 좋은 건가? 나는 싯다르타의 중도의 깨달음이 지극히 ‘알함답다’고 본다네.
(졸려서 안 되겠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함세. 졸린데 이러고 있는 것도 ‘알함답지’ 못한 일, ‘이제 그만’ 하면 멈추고, ‘이제 다시’ 신명을 풀면 아름답다 아니하리오. '알함다움'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려네.)
2025년 3월 6일 새벽
청와 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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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부친 편지의 내용
1. 자네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3.2. 중고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