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보내는 편지 8
3.5. 죽음, 그 쓸쓸한 미래
<현자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한 자네의 감상문으로부터 시작한 내 편지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네.
나는 '풀어서' 쓰는 게 서툴다네. 이치를 논해서 쓰는 것은 '길게' 쓸 수 있겠지만, 그 이치에 대해 '쉬운 비유와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세히' 쓰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퍽이나 지루한 글이 될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읽어주어서 고맙다네. 워낙에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이해해주시게.
3.5.1. <무엇이 죽는가 1> - 주어 편
동사 '죽다'는 자동사라네. 동사란, 동작이나 작용,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일세. '죽는다'라는 자동사는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경우에 해당한다네. 그래서 죽으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라는 것, 즉 술어에 집착하는 동안 주어인 <무엇>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세.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에서 '죽는다'라는 서술어의 의미는 주어인 '나'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네. 즉 '죽는다'라는 서술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묻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먼저 물어져야 한다는 걸세.
3.5.2. 하나면서 여럿인 나
<나>는 박수경(부모님이 지어주신 나)이면서, 부르스 박 곰팡(초등학생 때 이소룡과 괴도 루팡을 좋아해서 내가 지어준 나)이면서, 자갈밭-귤껍질(중고등학생 때 여드름 때문에 친구들이 지어준 나)이면서, 청와(대학생일 때 내가 지어준 나)면서, 지금은 박과장(지금 생업의 현장에서 지어준 나)이기도 한 것이 '내가 살아 온 역사'로서의 <나>일세.
또한 <나>는 물리화학적 존재로서의 나(自身)이면서, 감정적-의지적 존재로서의 나(自己)이면서, 의식적-언어적 존재로서의 나(自我)이기도 한 것이 '나를 이루고 있는 층위(層位)'로서의 <나>일세.
<나>라는 말로 가리키는 <그것>은 <하나>이면서, <그것>은 수없이 많은 ‘내인(內因)’과 ‘외연(外緣)’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럿>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을 기일원론에서는 ‘기일분수(氣一分殊)라고 한다네.
3.5.3. <무엇이 죽는가 2> - 추억 편
이제 <무엇이 죽는가>라는 물음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으리라 보네.
더 이상 누구도 나를 '부르스 박 곰팡'이라 불러주지 않으니 그 <나>는 죽은 걸세. '자갈밭-귤껍질'인 <나>도 죽고, '박대리'였던 <나>도 죽었다네. '박수경'과 '청와'와 '박과장'은 살아남아 <나>의 삶을 연명하고 있다네.
그런데 '부르스 박 곰팡', '자갈밭-귤껍질', '박대리'는 과연 죽었는가? '시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세월'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와 '나의 역사'가 과거라고 하는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여기에 생생한 느낌으로 살아있다네. 추억 속에 그대로인 <나>로.
내가 초등학교 때 '베스트 리 쇼팡'이라고 부르며 무술 영화를 같이 흉내 내며 놀았던 친구 '영준'이는 내 추억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네. 그 영준이의 추억 속에 '부르스 박 곰팡'이 아직도 살아있을는지 나는 모른다네.
주어가 분명해야 서술어의 의미를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세. 그런데 주어가 저리 복잡해서야, 서술어 '죽다'에 대해서 어디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3.5.4. <무엇이 죽는가 3> - 자아 편
3.5.4.1. 누가 생각하는가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제시했다는 명제라네.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두 개의 <나>가 들어있네. 나는 이 명제를 이렇게 분석한다네.
1) 자아는 생각한다.
2-1) 나는 자아이다. 또는, 2-2) 자아는 나이다.
3)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2-1)일 수는 없다네. <술은 막걸리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일세. 2-2)는 <막걸리는 술이다>라고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더 큰 의미가 들어있다네. <자아=나>라고 하는 '이성주의적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다네. 3)을 도출하기에 1)은 충분하지 않은 전제라네.
최소한 <술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자아>와 <술 마시는 나=자신>와 <술을 마셔서 알딸딸하게 기분이 거나해진 나=자기> 정도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네.
우리가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생각'이고, 그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놓은 것이 '사상'일세. 자아가 하는 짓은 모두 생각이라네. 허튼 생각도 잡생각도 어마어마한 생각도 다 자아가 하는 짓이라네. 자아성찰은 그 자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들여다보는 걸세.
자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혜안(慧眼)’이라고 한다네. 그 혜안으로 바라본 세계를 ‘세계관’이라고 하는 걸세. ‘세계에 대한 자아의 생각의 체계’를 세계관이라 하는 거지.
수많은 세계관을 일일이 다 이야기하는 것은 쓸데없고,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세계관이 일원론적이냐 이원론적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네. 지금 나는 나의 일원론적 세계관을 구축해 가고 있는 거라네.
3.5.4.2. 자아의 탄생
<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층위를 편의상 자신-자기-자아로 나누어 보자는 걸세. 자아의 탄생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세.
<자아라는 나>는 '수경'이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다네. '니 이름이 수경이란다. 우리 수경이~'하고 얼러 주시며 불러 주신 그 이름 속에서, ‘엄마말’을 통해서 나의 첫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네.
자아란, '분절음을 통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를 말하는 것일세. 두어서너 살 쯤 언어를 익히면서 획득한 자아는 자기-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 스스로 <나>라고 생각하는 꿈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네. 그것을 나는 <자아의 언어몽>이라고 하는 걸세.
결국 <자아라는 나>는 언어로 인해 생겨났다는 걸세.
3.5.4.3. 무아지경
흔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자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기도 해서, ‘자아를 멸해야 한다’느니, ‘자아에 가려진 참나를 찾아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네. 나는 ‘참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그것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자아’가 성장해서 승화되는 ‘무아(無我)의 경지(境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네.
‘무아의 경지’는 깨달음을 통해서야 얻을 수 있는 자아의 소멸이라네.
그런데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말이 있네. 얼핏 보면 ‘무아의 경지’와 같은 말 같아 보이네만, 다른 말이라네. 무아지경이란 신명풀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세. 어떤 일에 한껏 몰입돼 있거나, 자기신명(生意, 영혼)이 자아의 의식(생각)을 거치지 않고 자기-자신과 하나가 되는 상황이 무아지경일세. 자아가 자기-자신과 자기신명(생의, 영혼)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상황일세.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마치 무당이 신들린 듯 굿을 하는 것이 무아지경일세. 말을 할 때 순간적으로 자아의 생각을 거치면서 말이 나오게 되어 있다네. 그런데 흔히 <방언 터졌다>고 하듯 말이 터져 나오는 때가 있네. 그것도 무아지경일세.
나는 무아의 경지는 경험해 본 적 없지만 무아지경이야 노래를 부를 때 가끔 경험해 보았다네. 내가 무아지경에서 <쑥대머리>라는 춘향가 대목을 부르는 것을 한 여인이 보고 내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여인이 지금 내 아내가 되었다네.
결국 무아지경이란, 자기-자신이 어떤 일에 몰입하여, 자아의 작용이 일시적으로 멈추었거나 약화된 상황을 말하는 걸세. 그렇게 되기까지는 자아의 작용이 자기신명에 깊이 내면화되는 숙련과정이 필요하다네. 의식적인 행동의 무의식화, 그것이 쿵푸(工夫)의 핵심이라네.
3.5.4.4. 무아의 경지
공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해서, 자기 나이 칠십에 이른 경지를 종심이라고 했다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살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다는 뜻일세. 싯다르타는 35살에 '아뇩다라샴먁삼보리(無上正等覺)를 얻어, 살아서 열반의 경지에 드셨다네.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라네.
공자와 싯다르타의 그 경지를 내 어찌 알겠는가? 불교의 ‘사법계관(四法界觀)’을 통해 짐작을 해보려 하네.
우리가 살아가는, 욕망으로 인한 번뇌와 괴로움이 가득한 속세를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네. 흔히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는 걸세. 나는 35살의 나이에 ‘자아의 고뇌’로부터 도망치듯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다네. 그것이 ‘자아의 출가’였다네
머리를 삭발하고 내가 머무는 방의 이름을 ‘시천재(侍天齋)’라고 짓고 스스로 땡추 행세를 했다네. 그렇게 속세를 여읜 구도와 수행의 세계를 ‘이법계(理法界)’의 경지라고 한다네. 여러 유혹(?)을 물리치며 고행을 1년간 했다네. 그것이 ‘자아의 구도 수행’이었다네.
귀국해서 다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속세에 환속을 한 셈일세. 속세를 진탕에 비유하자면, 속세에 묻혀 살면서도 흙탕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고고하게 살려했다네. 그렇게 속세에 묻혀서도 흙탕에 물들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이사무애법계(理事无涯法界)’의 경지라고 한다네. 그것이 ‘자아의 착각 속의 깨달음’이었다네.
그러다 다 내려놓고(?) 지금은 시장 통에서 과일을 팔고 있다네. 그렇게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자아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달아야 한다는 걸세. ‘나는 이런 놈이다’라는 ‘자아의 생각’(我相), ‘너는 이런 놈이다’라는 ‘자아의 생각’(人相), ‘중생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자아의 생각’(衆生相), ‘생명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자아의 생각’(壽者相)이 있어서는 ‘연기(緣起)하는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는 공성(空性)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라는 걸세.
결국 나의 자아는 단 한 걸음도 사법계(事法界)를 떠나지 못했던 걸세.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스승노릇을 하고 있는 자아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이 바로 나였다는 걸세. 그것을 깨닫고 연기의 무분별심으로 무아지경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무시(無時)로 행하는 경지가 ‘사사무애법계(事事无涯法界)’일세. 자아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자기 영혼에 내면화되어 승화되는 거라네.
나는 지금 ‘사법계(四法界)’의 어느 세계에서 놀고 있다고? ‘사법계(事法界)’라는 거지.
가엾은 내 자아, 사법계에 갇혔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일세. ‘자기’에 관한 얘기는 다음에 함세.
지금까지 한 얘기들일세.
1. 자네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3.2. 중고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
3.3. 열반, 그 높은 곳을 향하여
3.4. ‘알함다운 영혼’이라 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