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9
3.5.5. <무엇이 죽는가 4> - 자기자신 편
앞에서 얘기한 <자아 편>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이성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네. 나는 그것이 편협한 인간관이라고 보고, ‘자신-자아-자기’의 인간관을 제시한 걸세. <자아 편>에서 얘기했듯이, ‘자아’는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의 언어적 대리인일세. ‘자기’가 만들어낸 ‘자아’가 오히려 ‘자기’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라네. 주인행세를 하는 ‘자아’가 아름다운 놈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자아성찰을 해서 그놈을 곰삭혀서 곱게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한 거라네.
자아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고 하면, 남는 게 뭔가? ‘자기’와 ‘자신’이라네. 본디 자기와 자신은 분리될 수 없는 거라네. 그런데 자기가 언어적 자기인 ‘자아’를 만들어 내서, 그 ‘자아’가 자신과 자기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불상사가 벌어진 걸세. 그걸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이라고 한다네. <사랑과 영혼> 같은 영화를 찍어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와서 어디로 가게 된다는 ‘상상’을 마치 ‘사실’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네.
이원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불연(不然, 이해되지 않는 것)을 기연(其然, 이해되는 것)화하지 않으면서 주장을 하기에 그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일원론적 관점에서 불연을 기연화해 나가고 있는 거라네.
3.5.5.1. 태초에 <몸>이 계시니라
육체와 정신이 둘이면서 하나라는 일원론적인 관점에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네.
<몸>은 '물체(物體)', '육체(肉體)', '신체(身體)'와 다른 개념이라네. 물체는 무생물체의 의미를, 육체는 생물체의 의미를, 신체는 인체의 의미를 강조하는 용어라고 보기 때문이라네. <몸>은 그 셋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일세.
그래서 <몸>을 한자로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신체(神體)>라고 쓰고자 한다네. 한자어보다는 우리말 <몸>이 더 마음에 든다네. <몸>은 신체(身體)이면서 정신이고, 사회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우주적 존재라네. 태초를 굳이 상정하자면, 가정할 수 있다면, <태초에 몸이 계시니라>라고 선포해야 마땅할 걸세.
<몸>은 ‘모음’이며 ‘모임’이며 ‘마음’이라고 세 가지로 해석해 보겠네. 모음이란 <몸>의 주체적이고 개체적인 측면을 말하는 걸세. 모임이란 <몸>의 집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측면을 말하는 걸세. 마음이란 개체든 공동체든 집체든 그 <몸>의 의지적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라네.
<몸>은 개체거나 사회거나, 물체거나 생물체거나 인체거나 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라는 걸세.
3.5.5.2. 생각하면서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 자기-자신
전에 한강의 시 <심장이라는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물’이 ‘동물’이 되고, 마침내 ‘사물’이 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지 않은가? 되고, 되고, 된다고 표현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는 인물이면서 동물이면서 사물이라고 해야 한다네.
그래서 <나>는 인물처럼 생각하면서, 동물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몸뚱이라네. <나>에게서 자아의 작동이 멈추게 되면, 즉 언어라는 기능을 빼버리면 동물처럼 움직이는 몸뚱이가 남게 된다네.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조차도 못하게 되는 뇌사(腦死)는 사물이 된 건가?
죽음의 판정은 사회적 문제라네. 심장의 정지와 호흡의 정지를 죽음으로 판정하는 것도 유기체의 죽음을 판정하는 것일 뿐, 사람과 생물체가 죽었다고 사람과 생물체의 기관이 그 순간에 죽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장기 이식도 할 수 있고 그런 게 아니겠는가? 심장 기관이든, 신장 기관이든, 안구든 세포 단위까지 그 <몸>은 모임이면서 모음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세.
3.5.5.3.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밥으로
내가 어제 어머니 생신 모임에서 먹은 생삼겹살은 ‘죽은 돼지’의 살코기이지만, 그 살코기는 ‘살아있는 살, 생삼겹살’이었다네. ‘죽은 고기’란 뭘까? 미생물에 의해서 분해된 고기라네.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 고기는 죽은 사물일까? 미생물이라는 생물이 바글거리는 생물덩어리라네.
인간도 한 삶이 다하면 그 <몸>이 다시 <밥>이 된다네. 새의 밥이 되는 천장(天葬, 鳥葬, <쿤둔>과 <나라야마 부시코>의 장면), 불쏘시개가 되는 화장(火葬), 바람 속 미생물의 밥이 되는 풍장(風葬), 물고기의 밥이 되는 수장(水葬), 흙속 미생물의 밥이 되는 매장(埋葬) 등이 인류가 죽음을 통해 밥으로 되돌아가는 문화의 모습이라네.
무엇의 밥이 되면 또 어찌 하리요? 이미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생명을 밥으로 먹고 살았지 않는가? 한 마리 뱀이 자기 꼬리를 먹는 형상, 또는 두 마리 뱀이 서로의 꼬리를 먹는 형상으로 나타난 고대의 우로보로스(Uroboros) 뱀 형상도, 생명과 우주에 대한 일원론적 생각을 나타낸 것이라네.
해월 최시형 선생님은 생명의 이치에 대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하셨다네. 수운 최제우 선생님께서 시천주(侍天主)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삼라만상이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당연한 말씀이라네. 그러니 어찌 하늘인 밥을 사람이 먹을 수 있냐고 묻자,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이라고 하셨던 걸세. 불이(不二)의 선언이라네.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땅이 곧 하늘이라는 거라네. 밥과 똥은 둘이 아니라, 똥이 곧 밥이라는 거라네. 예수 선생님도 그러셨다지 않은가? “내가 영생의 빵(밥)이다. 나를 먹고 나를 마셔라.”
<밥이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의 정신은 깊이 새겨보아야 할 깨우침의 말씀일세. 입으로 드는 밥만 밥이 아니라, 온몸으로 드는 느낌과 말씀이 모두 다 밥이라네. 제 몸에 들어와 자기-자신을 성장시키는 모든 것을 밥이라 하자는 걸세.
햇빛 냄새 공기 물 음식물 따위는 물질이라는 밥이라네. 물질이라는 밥은 자신이 먹는다네. 호감과 비호감의 느낌은 감정이라는 밥이라네. 감정이라는 밥은 자기가 먹는다네. 기호(신호와 부호, 언어) 따위는 말씀이라는 밥이라네. 말씀이라는 밥은 자아가 먹는다네.
몸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밥이라 하자고 했으니,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똥이라 하겠네. 눈물 콧물 침 땀 오줌 똥 따위는 물질적인 똥이라네. 물질적인 똥은 자신이 눈다네. 눈빛 표정 태도 몸짓 따위로 내보내는 감정적인 똥이 있다네. 감정적인 똥은 자기가 눈다네. 손말 입말 글말 따위는 말씀이라는 똥이라네. 말씀이라는 똥은 자아가 눈다네.
한자로, 쌀 미(米)짜 아래 다를 이(異)짜 하면 그게 똥 분(糞)짜일세. 벼 화(禾)짜 옆에 해 세(歲)짜 하면 또한 똥 예(穢)짜가 된다네.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간단한 이치인 것 같지만, 더 깊은 이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네.
'된다'고 할 때의 논리는, 밥은 똥이 아니고 똥은 밥이 아니라는 이분법의 논리라네. 이분법의 논리는, 밥은 하늘이고, 똥은 땅이다, 라고 하면서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라는 이원론적 차별의 생각이 깔려 있다네.
밥이 곧 똥이고 똥이 밥이라고 할 때의 논리는 역설의 논리라네. 역설의 논리의 바탕에는 밥이면서 똥이라는, 너와 나가 하나면서 둘이라는 일원론적 두레정신이 깔려 있다네.
먹고 싸는 것 가운데 소중하다 할 만한 것이 낳는 것일세. 낳는다는 것은 동물이 알이나 새끼를 낳는 것을 말한다네. 식물이 씨앗이나 열매를 맺는 것도 낳는 것이기는 마찬가지라네. <자기생명을 다른 개체를 통해 전개하는 것>이 ‘낳는 것’이라네. 그렇게 낳은 새끼들은 남이 아니라네. 피붙이라고 하듯, 모든 것이 한 가족, 한 겨레, 한 생명이라는 일원론적 깨달음이 필요한 걸세. 수백만 광년을 날아와 내 눈에 안기는 밤하늘의 별빛(光子)과 나는 한 우주, 한 생명이라는 걸세.
한 번 더 들어가 보세. 자기가 자기를 낳는 게 있다네.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인 알을 움틔우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낳는 것이라네. 나는 그것을 <알움다움>이라 했네. <알움다움>은 자기생명(자기신명)의 자기 전개라네.
먹고 싸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고, <나>를 온통 <너라는 또 다른 나>에게 밥으로 돌려주는 것이 죽어가는 일이라네. 내 새끼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추신) 오늘 <똥>은 여기까지 누겠네. 다음 <똥>의 주제는 <영혼 편>일세.
2025년 3월 17일
청와 박수경
지금까지 한 얘기들일세.
1. 자네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3.2. 중고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
3.3. 열반, 그 높은 곳을 향하여
3.4. ‘알함다운 영혼’이라 함은?
3.5. 죽음, 그 쓸쓸한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