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7
앞 서신에, 열반이라는 그 높은 곳에 모두 다 올라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묻고, 나는 발심이 중요하다고 했네. 내 발심은 ‘열반’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라 했고, 아름다움을 ‘알음다움, 알움다움, 안음다움, 앓음다움, 알함다움’으로 풀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네. ‘알함다움’을 제외한 나머지 넷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많이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알함다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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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알함다운 영혼’이라 함은?
‘알함다움’이란, 내가 지어낸 말이라네. 나는 지금의 ‘못난 삶’으로부터 조금은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발심을 했다네. ‘알함다움’이란, 내가 ‘아름다움’에 대해 다섯 가지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라네. 인식론적인 관점에서의 ‘알음다움’, 성장론적인 관점에서의 ‘앓음다움’, 관계론적인 관점에서의 ‘안음다움’, 창조론적인 관점에서의 ‘알움다움’, 실천론적인 관점에서의 ‘알함다움’ 등 다섯 가지 개념이라네.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를 하는 것일세. 일을 하는 것이나 쉬는 것이나, 모든 ‘함(行爲)’은 나의 영혼이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네. 그 ‘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앎(認知)’일세. 앎은 영혼의 정신적 활동일세. 그 ‘앎이 영혼을 형성해가면서, 그 영혼에 의해 함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알함다움’이라 하려네. 즉 알함다움이란, 앎과 함이 상호작용하는 영혼의 활동 모습일세.
3.4.1. 앎에서 영혼까지
앎은 영혼의 활동이지만, 그 앎으로 인해 영혼이 형성되어 간다네. ‘학문’과 내면화의 방식이 영혼의 형성과정일세.
학은 '학습(學習)'이고, 문은 '문리(問理)'라네. 학습은 <논어>의 '학이시습지'에서 온 말일세.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는 것', 그것이 학습일세. 나는 그것을 '배움'이라 한다네.
배움이란, 무한한 가능성으로 제 안에 있던 것을 창조적으로 발현하는 일일세. 공부, 버릇들이기, 길들이기 등으로 말하기도 하고, 부정적 느낌으로는 세뇌시키기, 수동적 느낌으로는 중독되기 등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자기 몸에 배게 하는 모든 것’이 배움이라네.
배움이 짐승들의 수준에서는 별 문제가 안 되네만, 인간에 이르러 배움은 ‘언어화’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차원변화가 필수적이라네. 언어화 과정이란, 사물을 개념화하는 과정일세. ‘언어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짐승으로 태어나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라네. 언어를 통해서 짐승의 영혼, 자연의 영혼이 아닌, 인간의 영혼, 문화인의 영혼, 문명인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라네. 그렇다고 짐승의 영혼, 자연의 영혼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네. 그
둘의 영혼이 혼거하면서 영혼이 성장-발달해 가는 것이겠지.
언어화 과정으로 인해, 내면화라는 과정이 필요하게 되었다네. 언어는 개념(관념, 생각)일 뿐 그 언어적 개념이 곧 바로 영혼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네. 언어적 느낌이 느낌의 반응체계인 영혼에 가 닿아서 저절로 작동하게끔 구조화되는 과정이 내면화 과정일세. 자아가 언어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체득(體得)하고 터득(攄得)하는 것이 내면화 과정이고, 육화(肉化)되는 과정이라는 걸세.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내용면에서 이야기하네만, 그래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네.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각자의 몫일세. 남에게 그 깨달은 내용을 전해줄 수 없다니 어쩌겠나.
나는 깨달음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보는 걸세. 무엇을 깨달았건 간에 그것이 단박에 ‘자기 영혼’에 내면화되느냐, 그러면 그것을 돈오돈수라 하겠고, 수없이 내면화과정을 거쳐야 하느냐, 그러면 그것을 돈오점수라 할 수 있겠다는 걸세. 돈오돈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겠네만, 돈오돈수만 옳고 돈오점수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세.
결국 앎과 함을 통해 어떤 것이 내면화되고 육화되는 것을 통해 영혼이 형성되어 가는 거라고 본다네. 그렇게 삶의 수많은 길들(道)에서, 영혼에 체득되고 터득된 것을 ‘덕(德)’이라 하는 걸세. ‘도(道)’는 천지가 유행하는 이치이고, ‘덕(德, 得)’은 그것이 자기 영혼에 체득된 것이라네.
도와 덕이 이원론적 세계관에서처럼 반드시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닐세. 삶이 온통 배움일 수 있는데, ‘언어화 과정’, ‘문명화 과정’으로 인해, 잘못된 이치도 배우고 나쁜 짓도 익히는 ‘문제(問題)’가 발생하게 된다는 걸세.
그래서 배움의 과정에서 방법과 이치를 묻는 물음(問理)이라는 공부가 중요하게 되었다네.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언어적 사태일세. 물음으로 인해, 물을 수 있음으로써, 인간은 탁월한 창조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네. 천지를 재창조하고, 급기야 신(神)까지 창조하게 된 걸세. 열반(涅槃)이라는 개념도 어쩌면 그 결과물일지도 모르네.
이제 인간 영혼은 개념들의 박물관이 되어버렸네. 어떤 개념들을 자기 삶의 동반자로 삼아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네. 나의 이 작업, 일원론을 바탕으로 내 삶과, 현재 우리 문명사회의 삶과 천지가 유행하는 이치를 생각해 보는 작업도 그 물음에서 비롯된 것일세.
3.4.2. 어떤 영혼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슬픈 사연으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 잠든 자기 영혼은 죽어버린 것이며 / 만물은 보기와는 딴 판이라 해서. / 영혼이 없었던들 너희는 먼지의 신세 / 먼지로 돌아갈 것을. >
- (롱펠로우, <인생예찬>, 앞 부분)
고등학교 때 박봉기 공업선생님이라고, 자네도 기억할 걸세. 출석부와 짧은 막대기를 들고 들어오셔서, 공업 수업은 미뤄두시고 저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이라는 시를 외워서 칠판에 쓰시는 것을 받아 적었었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던지. 그 시를 받아 적으면서 그 시간에 거의 그 시를 다 외워버렸었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시에 매료되게 만들었을까?
내 영혼이라? 나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던 걸까? 나의 슬픈 영혼, 잠든 영혼, 죽어버린 영혼, 먼지가 된 영혼, 내 영혼을 두드리는 시였다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나의 영혼을 만나지 못하고, 못난 영혼으로, 나쁜 영혼으로, 아픈 영혼으로 살아야 했다네. <청와 1.0 : 나의 지식의 오성의 총체의 합이 정당하게 판단한 나의 주관> 버전으로 내 방황하는 영혼의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네.
그러던 어느 날 윤동주 시인이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마지막 부분)라고 했듯이, 내가 내 못난 영혼, 슬픈 영혼, 아픈 영혼을 처음으로 만난 날이 있었다네.
내 영혼은, 말로는 보살에 성인군자 노릇까지 하면서도, 술에 절어서 들개처럼 무엇이든 이빨로(말로) 물어뜯으려 하는 깊은 병을 앓고 있는 병든 영혼이었다네. 이소룡의 절권도처럼, 닥치는 대로 <청와>라는 쌍절곤을 휘둘러대는 싸움닭이었지.
그날 병든 내 영혼을 눈물로 친견한 후로 그 불상한 영혼에 새 삶을 선물해주기로 했다네. 그것이 나의 <발심(發心)>이었다네. 병든 영혼을 고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거듭나자는 거였다네. <청와 2.0 : 아름다운 영혼>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보자는 거지. 컴퓨터야 업그레이드를 하면 바로 새 버전이 작동하지만, 사람은 기존의 버전에 대해 하나하나 새 버전을 갈아 끼우는 패치(patch)작업을 해주어야 한다네.
그 업그레이드를 위한 패치 작업을 나는 ‘곰삭힘’이라고 한다네. 뻣세고 떫고 설익은 맛을 익도록 하는 것이 삭힘이고, 아예 예전의 성질머리를 고쳐서 다른 성질로 바꾸게 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곰삭힘’이라는 걸세.
아직 내 영혼은 <청와 1.0>의 거칠고 날선 느낌이 지배적이라네. 아직 <청와 1.0>의 ‘알음답지’ 못한 ‘앓음다움’이 나와 세상을 더 ‘안음답게’ 끌어안지 못해 ‘알움답게’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네.
이제 내 잠든 영혼을 깨우고 병든 영혼을 고쳐 ‘알함다운’ 영혼 <청와 2.0>으로 거듭나도록 끊임없이 ‘윤회’의 바퀴를 ‘창조’적으로 굴리고 있는 걸세.
나는 싯다르타께서 깨달은 첫 번째 원리인 '중도의 원리'가 매우 소중하다고 본다네. 중용이라 하든 시중이라 하든 동적 평형이라 하든 건강한 생명,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을 중도의 원리 속에서 찾아보고 싶은 걸세. 열반의 길이든 중생의 길이든, 자기 발심이면서, 자기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걸세.
나야 열반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불상한 중생이기에, 그저 내 살 길은 내 안의 못된 버르장머리 쓸 만하게 뜯어고쳐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이겠거니 하면서, 묵묵히 ‘곰삭힘’의 길을 내쳐 가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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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네. 죽음은 겪어보지 않아 뭐라 해야 할는지 다음 서신에서 이야기해 보세.
2025년 3월 10일 새벽
청와 박수경
앞서 부친 편지의 내용
1. 자네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3.2. 중고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
3.3. 열반, 그 높은 곳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