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5
3.2. 중고 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
3.2.1. 마뜩치 않은 불연으로서의 윤회론과 창조론
'윤회론'과 '창조론'은 불연(不然)을 전제로 한 이원론적 관념 상품들일세. 그래서 나는 이 상품들을 폐기할까 하다가, 기연(其然)을 바탕으로 새롭게 가공해서 일원론의 상품으로 출시하기로 했네.
‘윤회론’이 불연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3.1.에서 이야기했네. ‘창조론’ 또한 불연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네.
‘창조론’의 이야기대로, 무한 회귀 끝에 우주도, 천지도 없는, 창조 이전을 떠올려 보세. 거기 홀로 ‘야훼’라는 무엇이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면 ‘야훼’는 어디에 있었다? 뭐하고 있었다? 그 ‘야훼’가 그때도 이름이 ‘야훼’였다? ‘야훼’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불러줄 이름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이름은 언제 생겼다? 자기가 창조한 피창조물인 인간에게 알려줄 이름이 필요해서 자기 스스로 이름을 지어냈다? 아니면 피창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런 걸 불연이라고 하는 걸세. 석연(釋然)치 않은 관념적, 상상적 대상을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 불연과 기연의 이원론이 형성된다는 걸세.
이와 같은 불연의 존재를 전제로, 그 존재가 우주를, 천지를 창조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다면 귀신이 알지 못할 불연의 사건이고, 스프든 가스든 기존의 어떤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빚어냈다면, 그와 같은 이차적 창조는 기연으로 인정할 만하네. ‘6일 동안’의 창조를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네. 다음 항목에서 이야기함세.
창조론의 불연에 관한 석연치 않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3.2.2. 윤회론과 창조론의 재활용
창조론의 태초도, 윤회론의 죽음 이후도 경험으로는 알 수가 없네. 윤회와 창조를 경험의 영역, 기연의 세계로 가져와 보세.
싯다르타께서 설하신 ‘무아(無我)’의 이치에 합당하게 윤회를 이해하는 방법은, 연기즉윤회(緣起卽 輪廻) 연기가 곧 윤회라고 보는 것일세. 매 순간순간의 찰라가 연기라네. 직전의 과거가 멸하고 직후의 미래가 생하는, 생멸의 연기가 곧 윤회랄 수 있다는 걸세.
이렇게 되면 윤회는 벗어나야 할 사태가 아니라, 연기처럼 깨달아야 할 사태가 되는 거라네. 즉 연기가 공함을 깨닫듯, 연기가 곧 윤회이므로, 윤회가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일세. 더는 윤회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윤회를 잘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네.
이와 같은 논법과 이치를 기일원론에서는 ‘생극(生克)’의 원리라고 한다네.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서로 상극의 관계에 있다는 말일세. 그런데 그 대상을 탁월하게 극복하는 방법은 그 대상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 그 대상이 훌륭하게 생성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네. 생성이 곧 탁월한 극복이 된다는 거라네. 이와 같은 이치와 논법을 ‘생극’의 원리라고 한다네.
같이 안 살 거면, 상극으로 갈라서면 되네.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공생이고, 공동체이고, 한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이것이 내가 지향하고 있는 안음다운 길이라네. 생명 전체를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홍세화 선생님 말처럼, 앙똘레랑스일 수밖에 없네. 그 판단은 쉽지 않네. 선악과 관계된 논의를 길게 해야 하므로, 여기까지.
연기(緣起) 곧 윤회(輪廻)를 생성으로 극복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고, 부활하는 것일세. 그것을 두고 나는 ‘모든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발현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네.
우주생명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네. ‘부지불연 고불왈불연(不知不然 故不曰不然)’, 수운 선생님도 그러셨지 않는가?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고로 말할 수 없다고. 그건 모름지기 놓아두고, 6일이 걸렸든 억겁이 걸렸든 우주생명은 그렇게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발현해 온 것이라 본다네.
우주생명의 자기창조일세. 기일분수(氣一分殊), 기는 하나면서 여럿이라는 기일원론의 논지대로, 우주생명은 하나면서 여럿이라네. 생명의 자기창조의 원리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은 이천식천이라 했네. 생명이 생명을 먹고, 자기가 자기를 먹음으로써 거듭난다는 의미라네. 고대인들은 이것을 뱀이 자기 꼬리는 먹는 형상, 또는 두 마리 뱀이 서로 꼬리는 먹는 형상인 우로보로스(Uroborus)로 나타냈다네.
고대의 일원론적 세계관, 대등의 원환적 세계관, 생극적 세계관이 중세의 이원론적 세계관, 차등의 대립적 세계관, 입으로 상생을 말하면서(종교적) 신분으로 상극을 내세우는(현실적) 이원적 세계관에 의해 대치되었고 보네. 나는, ‘생극’의 원리에 의해 고대의 일원론적 세계관, 대등의 원환적 세계관을 재생함으로써 중세의 이원론적 폐해와 잘못을 극복하는 작업을 전방위에서 해야 한다고 보네.
중세의 이원론적 불연의 윤회론과 창조론을 극복하고 생명의 윤회론과 창조론을 생성하는 작업이 잘 이루어졌다고는 보질 않네. 무엇이 되었거나 한꺼번에 홀라당 이루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일세. 생성을 이루기 위해 지지부진하더라도 묻고 배우며 깨달아가는 과정이 알움답고 알음다운 모습이라고 보네.
내 안의 어떤 씨알이 어떻게 움터 나올지 알 수 없네만, 그 방향은 불연을 기연화하면서 기일원론을 생명일원론이라는 관점에서 재창조하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네. 씨도 안 먹히는 소리 들어주어서 고맙네.
밤이 꼴딱 새 버렸네. 어제는 삼일절이었네. 대한독립만세~ 나와 아내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네. 수진이-수경이 독립만세~ 생명이 생명을 평화롭게 누리는 것, 그것이 생명독립일세. 생명독립만세~
‘열반’은 싯다르타께 여쭤보고 뭐라 하시거든 그 말씀을 따르겠네. 또 보세.
2025년 3월 2일 새벽
청와 박수경 睡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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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부친 편지의 내용
1.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에 대해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