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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기 때문에 꼴리고 흘러서 스며드는 거라네

친애하는 벗 세훈에게 부치는 편지 10

by 청와

3.5.6. <무엇이 죽는가 5> - 영혼 편

오늘은 먼저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이라는 시를 먼저 감상해 보겠네.

인생예찬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1807 - 1882)

슬픈 사연으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공허한 헛된 꿈일 뿐이라고

잠든 자기 영혼은 죽어버린 것이며

만물은 보기와는 딴판이라 해서.

인생은 참되다 인생은 엄숙하다

더욱이 무덤이 네 갈 곳은 아니려니

영혼이 없었던들 너희는 먼지의 신세

먼지로 돌아갈 것을.

우리가 가야할 곳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려니

다만 오늘보다 나아간 우리들 자신을

내일마다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일 뿐.

예술은 길고 인생은 덧없어

비록 우리의 심장이 아무리 굳세고 어엿할지라도

숨죽인 북처럼 언제나 둥둥 울리는

무덤에의 장송 행진곡이란다.

이 세상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마소가 되지 말고

싸워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울 성 싶어도 미래를 믿지 말라

가버린 과거는 가버린 대로 묻어버려 두려무나.

행동하라, 살아 숨 쉬는 현재에서

가슴 속엔 심장이, 머리 위엔 신이 있도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장엄하게 할 수도

그리고 떠날 때,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국들을 남길 수 있다고.

인생의 고귀한 바다를 항해하다가

난파당한 절망의 형제가

어쩌면 그것을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을

그러한 발자국들을.

그러니 일어나서 일하자꾸나.

어떤 운명과도 맞부딪칠 심장 지니고

자꾸 이룩하고 자꾸 추구하면서

노력하며 기다리길 배우자꾸나.

나는 어떤 번역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고등학교 때 박봉기 공업선생님이 칠판에 써준 저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네. 그때 ‘숨죽인 북처럼 언제나 둥둥 울렸던’ 내 심장이 이제는 얼마나 굳세고 어엿해졌는지. 박봉기 선생님과 롱펠로우 시인에게 먼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네.

그런데, 이제 와서 ‘영혼이 없었던들 너희는 먼지의 신세 / 먼지로 돌아갈 것을’이라는 구절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까닭이 무얼까? 그 시절, 영혼을 찾기 위해 교회에도 찾아갔었네. 결국 거기서는 찾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해서 불교와 동학(東學)과 기학(氣學)을 만나서 목마름에 물을 축여도 보았지만,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무엇이 남아있었다네.

이성복이라는 시인이 내게 던져 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는 화두, 어느 수도승이 물었다는,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는데 그러면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우스개 물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 내가 나에게 던져 준, <들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라는 생각 등이 <영혼>의 문제와 함께 오래 나와 함께 해왔던 걸세.

이제 <무엇이 죽는가>라는 주제의 마지막 ‘영혼 편’에 관한 이야기라네.

3.5.6.1. ‘영혼이 없었다면 먼지의 신세’

저 말에 대해, 나는 대번에 이런 반문이 나온다네. “그러면 먼지는 영혼이 없는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뭐겠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어야 한다는 걸세.

<영혼이란, 육체와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생명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일단 상식적으로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얘기해 보세.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다던가? “한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단어를 정의해야 한다”고. 영혼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육체’와 ‘마음’ ‘생명’ ‘힘’ 등 네 가지가 정의되어야 하겠군.

‘육체’와 ‘마음’의 관계는 ‘신체(神體)’라는 말로 이야기했네. 이 앞에 보낸 편지 <태초에 <몸>이 계시니라>에서, <몸>은 모임이면서 모음이면서 마음이라고 했다네. 육체의 두 측면, 개체와 주체, 전체와 객체를 각각 <모음>과 <모임>이라 하자고 했네. <몸>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회라는 것을 이야기한 걸세.

앞 편지에서 <마음>은 ‘의지적 경향성’이라고 한 것을 확충(擴充)해 보려네. 모든 <몸>, 즉 사물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네. 그것을 물리적인 표현으로 ‘벡터(vector, 이제부터 이것을 ‘방향성’이라 하겠네)’라고 하려네. 그 방향성을 갖지 않는 것을 물리적으로 ‘스칼라(scalar, 이제부터 이것을 ‘경향성’이라 하겠네)’라고 하는데, 질량 에너지 밀도 전하량 등도 실재로는 ‘방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네. 즉 질량이 있다면 그 질량은 반드시 그만한 크기로 어떤 힘을 행사한다는 걸세.

이것을 <마음>의 문제로 가져와 보세. 어떤 <몸>이든 그 <몸>은 다른 어떤 <몸>과 더 큰 관계 속에서 그 <몸>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 실제로 어떤 ‘방향성’으로 영향을 준다는 걸세. 그것을 ‘작용’이라 하지. 다른 <몸>에서는 ‘반작용’이 일어나겠지. 그 반작용 또한 그 다른 <몸>의 ‘경향성’이 ‘방향성’으로 발현되는 걸세. 이 <몸>의 ‘경향성’을 마음이라 하고, 그 마음이 <몸>으로 드러나 작용, 반작용, 상호작용하는 것인 셈이지.

어느 단계까지?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고(至小無內),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至大無外)고 말할 수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론적인 <몸>일세. 즉 먼지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다 ‘경향성’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걸세.

<인간의 마음>, <생물체의 마음>이 없다면,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는 <몸>’이 모이고 흩어지는 취산작용(聚散作用)이 <나>의 궁극적 모습이라네.

<영혼이 없었다면 너희는 먼지의 신세 / 먼지로 돌아갈 것을>

3.5.6.2. 떨리는 영혼의 꼴림

앞에서는 ‘육체’와 ‘마음’을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생명’과 ‘힘’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

싯다르타는 삼라만상이 모두 인연에 의해 연기(緣起)하는 것이라 했네. 그래서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다고 했네. 혜강 최한기는, 그 연기를 풀어서, 활(活, 生起) 동(動, 運動) 운(運, 周旋) 화(化, 變遷)라고 했네. 북한의 철학자들이 혜강의 철학을 두고 ‘유물론(唯物論)’이라고 한 것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네. 생각의 근본을 사물에 두고 보면, 혜강의 철학은 ‘유물론’이 맞다네.


런데 생각의 근본을 <몸(神體)>이라고 하면, 혜강의 철학이나 나의 생각은 ‘생명론’일세. 즉 사물도 동물도 인물도 모두 생명이라는 <몸>이 활동운화하는 것이라는 걸세. 그래서 사물도 생물도 인물도 모두 생명이라는 점에서 같다네. <몸>의 상태가 어떻게 연기하는가에 따라, 사물이기도 하고 생물이기도 하고 인물이기도 한 것이 <몸>의 활동운화일세.

<몸>에 대해 불교에서는 ‘심(心)’을 중시하고, 유교에서는 ‘물(物)’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네. 나는 <몸>을 <몸>으로 보자는 걸세. 그 말은 달리, <몸>을 <생명>으로 보자는 걸세. 먼지가 생명이고, 우주가 생명이라는 걸세. <기(氣)>라는 중세어를 <생명>이라는 근대어로 확충하자는 걸세.

<생명>이 해명된 걸로 하면, 이제 <힘>을 정의하면 되겠네.

<몸>의 ‘경향성’과 ‘방향성’이 <몸>의 <힘>일세. ‘몸의 경향성’과 ‘몸의 방향성’을 ‘체용론(體用論)’이라는 논법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해 보려네. 체는 근본을 말하고, 용은 작용을 말하는 것일세.

근본은 ‘몸의 중심’일세. 몸의 중심은 몸이 활동운화하는 생명이기에 변화하는 것일세.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몸>을 만들어가는 거라네. 그래서 몸의 중심은 항시 ‘떨림’으로 존재한다네. 쿼크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작용은 말 그대로 ‘몸의 작용’일세. 몸의 작용은 몸의 중심이 어떤 방향성으로 몸끼리 작용 반작용하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네.

주희와 이황은 체를 미발(未發), 용을 이발(已發)로 설명했는데, 나는 체라는 경향성은 내발(內發), 용이라는 방향성은 외발(外發)로 본다네. 둘 다 이미 다 힘이 발하는 것이라고 보는 거라네. 발(發)한다는 한 글자의 중세어를, 두 글자의 근대어로는 발기(發起) 또는 발현(發現)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을 순 우리말로 ‘꼴림’이라고 한다네.

사람으로 돌아와서, 사람 안의 중심, 그 중심의 떨림, 그 떨림의 경향성이 <영혼>이라네.

<영혼이 없었던들 너희는 먼지의 신세 / 먼지로 돌아갈 것을>

이제 이 시의 구절을 다시 써야 한다는 걸세.

<인간의 영혼이 아니었던들 너희는 짐승의 신세 / 짐승의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본디 인간의 연기는 사물에서 비롯되었다네. 물질이 어찌어찌하여 연기된 정자(精子)를 아비로부터 받고, 물질이 또 어찌어찌하여 연기된 난자(卵子)를 어미로부터 받아 어찌어찌 연기하여 울부짖으며 이 땅에 짐승의 영혼으로 태어난 걸세. 엄마로부터 또 다시 엄마말을 배워 어찌어찌 연기하여 다시 인간의 영혼으로 태어난 걸세.


나의 영혼의 모습이 무어 그리 대단해서 누군가 연구해 주지는 않을 걸세. 내가 윤동주의 시에서, 한강의 시에서 그들의 시의 영혼, 시혼(詩魂)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 영혼은 결국 내가 들여다보아야 한다네. 그것이 자기성찰일세. 영혼이란 결국 ‘자기의 중심’, ‘자기의 심층적 경향성’이기 때문일세.

3.5.6.3. 떨리고 설레기 때문에 꼴리고 흘러서 스며드는 거라네

<몸>이 인간으로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영혼이 꼴려서 자기-자신이 어떤 짓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라네.

살아서의 영혼은 자기 안에 떨리는 중심으로 내면화된다네. 또한 자기-자신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는 모든 그물망에 자신의 떨림을 전해준다네.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의 영혼을 만난 게 아닐세. 상대의 떨림을 느낄 때 그 영혼을 만난 걸세. 자기의 떨림에 그 떨림이 가 닿았을 때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걸세. 상대의 영혼이 내 영혼에 흘러들어서 스며들게 된다는 걸세.

산 자의 영혼은 그렇게 산 자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개체와 주체를 넘어선 <몸>인,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네. 공동체란 서로의 영혼이 하나로 얽혀 있는 것일세. 그래서 하나면서 여럿이라고 하는 걸세. 서로의 영혼이 극단적으로, 둘로 나뉜 지금의 사태는 공동체가 무너진 모습일세. 내 영혼을 아름다운 영혼으로 생성시키는 것이, 상대의 영혼을 극복하는 바른 길일세. 이 번 싸움엔 이기겠지만, 반동이 다시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네. 결국 갈 길은 생성으로 극복하는 길이라는 걸세. 엇길로 나간 다른 얘기였고.

영혼의 교감은 시간과 공간을 망라(網羅)하는 걸세. 이순신 장군의 투혼, 애국혼은 아직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지 않은가? 그러면 ‘노량해전’이라는 역사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영혼만 살아있다는 건가? 활을 쏘다 조총에 맞아 바다에 거꾸러진 수많은 영혼들이 있지 않겠는가 말일세. 대승 아니라, 완승을 거두고 적들을 완파시켰다고 해서 절대로 환호하고 즐거워해야할 일이 아니란 말일세.

영혼의 교감에 거룩한 높이에 이른 분이 싯다르타일세. 모든 중생을 구제하시겠노라 했다지. 이제 그 중생의 개념(相)을 확충해서, 유정물뿐 아니라 무정물인 사물까지도 생명(衆生)이라 하려네. 인간이 만든 기구와 시설들 모두 인간의 영혼이 깃든 사물들이네. 옷 밥 집 문화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전 인류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거지.

나는 내가 살았던 모든 것에 내 영혼의 흔적을 남기는 걸세. <그러한 발자국들을>.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양인자 김희갑이 노래말을 쓰고 조용필이 불렀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일세. 어떤 영혼으로 살아갈 것인가? 결국 자기 문제라는 걸세.

이제 자네에게 부치는 편지의 총괄적인 이야기만 남았네.

지금까지 한 얘기들일세.

1. 자네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2. 인식방법에서 느껴지는 중고대인의 알음다움에 관하여

2.1. 싯다르타의 '자등명 법등명'

2.2. 최제우의 '불연기연'

2.3. 혜강의 '추기측리'

2.4. 율곡의 <격몽요결서>

3. 불연에 대한 청와의 생각들

3.1. '윤회'라는 해괴한 상품

3.2. 중고신상품 출시, '윤회론'과 '창조론'

3.3. 열반, 그 높은 곳을 향하여

3.4. ‘알함다운 영혼’이라 함은?

3.5. 죽음, 그 쓸쓸한 미래

3.5.1. <무엇이 죽는가 1> - 주어 편

3.5.2. 하나면서 여럿인 나

3.5.3. <무엇이 죽는가 2> - 추억 편

3.5.4. <무엇이 죽는가 3> - 자아 편

3.5.5. <무엇이 죽는가 4> - 자기자신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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