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의 퇴임과 새 출발 이야기
오늘도 변함없이 새벽 시각에 차를 몰고 경기도 남쪽에 위치한 집을 나섰다.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출발하면 50km 거리인 회사까지 1시간 이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출발 시각에 따라 회사 도착 시각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운전을 하면서 올 한 해 회사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맡은 부서의 실적과 조직 문화 조사 결과를 생각하니 자부심이 느껴진다.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디•태양의 ‘Good Boy’ 볼륨을 좀 더 올렸다.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I am a good boy. I am a good good. ~”
빅뱅과 권지용(지디)의 팬인 나는 운전을 하면서 남자 아이돌 댄스 음악을 주로 듣는다.
여의도에 있는 회사 빌딩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실까 잠깐 고민하다가 인근의 편의점으로 갔다. 모닝커피는 빌딩 내 카페의 아이스라떼 또는 편의점의 ‘빽다방 황금라떼’를 주로 사서 마신다.
편의점에서 산 커피 페트병을 들고 빌딩 흡연장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왼손에 쥔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오른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 타이밍을 놓쳐 발 스텝이 맞지 않았다. 몸의 중심이 약간 흔들리는 순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커피 페트병이 “튕”하는 소리를 내고 바닥에 뒹군다.
페트병을 열지 않아 바닥에 쏟은 것은 없었지만 기분이 우울해졌다. 요 며칠 사이 비슷한 일들이 몇 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임원 이사철인 연말이 다가오는 민감한 시기에 반복되는 불길한 징후는 뭔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내심 스스로를 격려했다. ‘올 한 해도 회사 생활 잘해 왔잖아’.
7시 조금 전 회사 내 자리에 앉았다. 9시 업무가 시작되기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아 있다.
이른 아침 2시간은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업무 시간에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부서 내 10개 팀의 업무 보고와 협의, 대표이사 보고회 배석, 내외부 미팅 등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하루 중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자리에서 노트북 전원을 켜면 나의 머리는 회사 모드로 전환이 시작된다. 이메일을 먼저 확인한다. 휴대폰으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첨부 문서의 용량이 큰 이메일은 노트북에서 체크를 한다. 업무와 관련된 이메일에는 직급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답변을 한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등 단순한 내용이라도 답변하는 것이 보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스케줄을 체크한다. 오늘, 이번 주, 이번 달 스케줄을 리뷰하고 오늘 일정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넣어 둔다. Profit Center 부서장이 되고 나서는 부서의 모든 리더들과 ‘회사 outlook 일정표’에 일정을 등록하기로 합의하였다. 등록된 일정은 리더를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고, 미리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하는 유용한 툴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회사에서 인상을 쓰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나의 원칙이지만, 가끔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등록된 일정이 아닌데 보고서를 가지고 오는 팀장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난다. 내가 그 건을 보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깊이 있는 나의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 양쪽 모두에게 시간 손해이라는 생각에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침 나만의 시간 마지막 단계, 오늘 협의할 보고서를 읽어 본다. 대면 보고 전에 이메일로 사전 보고하는 것이 회사의 Rule. 내용을 미리 생각해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보고 시 나누는 의견의 깊이 차이는 매우 크다.
08:30, 나만의 업무 예열 프로세스를 마쳤다. 업무 시작 전 흡연을 위해 엘리베이터홀로 이동하던 중 휴대폰이 울린다. 문자 등 사전 알림 없이 바로 전화하는 사람을 싫어하기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흠. 받을 수밖에 없는 전화군.’
대표이사 또는 그 비서의 전화는 위 짜증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홀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안녕하세요. ○○씨.”
“대표님께서 9시 반 대표이사실에서 미팅하자고 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참석자는 누군가요?”
“전무님 혼자입니다.”
“… … 알겠습니다.”
업무 시작 이른 시각부터 대표이사가 나를 보자고 한다. 그것도 나만 혼자. 아침에 커피 페트병이 바닥에 떨어질 때 났던 소리가 머릿속에 다시 울린다.
‘뭔가 불길하다.’
다음 예정 글 : 제2화_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