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의 퇴임과 새 출발 이야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임원들은 긴장하게 된다. 1년마다 계약하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매년 계약이 갱신되어야 임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
Profit Center 부서를 맡기 직전, 대표이사 스텝 부서 부서장으로 3년간 근무했었다. 스텝 부서에는 HR팀도 포함되어 있어 ‘임원 인사 프로세스’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지금 시기가 그 해 퇴임 임원의 확정과 통보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과 아침부터 대표이사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관련이 있을까?
우리 부서의 작년과 올해 실적도 좋고 나의 리더십 평가도 뛰어난 편이라 내가 그 대상일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이사가 나를 찾는 타이밍이 꺼림칙하다.
비서와의 짧고 무거운 통화를 마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1층 옥외 흡연장으로 향했다.
흡연장에서 자주 만나는 회사 후배들이 여느 때와 같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도 습관적으로 답례를 했지만, 나의 표정이 평소와 다름을 그들은 감지했을까?
두 번째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흡연장에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한쪽 구석으로 갔다. 대표이사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약 40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대표이사실로 갈 수는 없다.‘
‘가장 빠른 방법을 쓸 수밖에.’
후배 상무인 HR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스텝 부서 부서장일 때 HR팀장이었던 그와는 친분이 두텁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HR실장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거의 확신이 든다.
“대표님이 나를 찾으시던데 … 그 이유가 맞나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
“네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서로 직접적인 표현이 없는 선문답을 나누었지만, 둘 다 그 의미를 익히 잘 알고 있다.
“아닙니다. 인사 업무를 나도 잘 알고 있기에 보안 유지가 중요하지요.” 나는 담담한 척하는 목소리로 답하면서 추가 질문을 하였다.
“Job-Off는 언제부터 인가요?”
“다음 주부터 연말까지 일정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면담 이후에 잠시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아닙니다. 회사의 결정과 흐름을 받아들여야지요. 이번에 퇴임하는 임원은 나 말고 누구인가요?”
HR실장은 나와 A전무, 2명이라고 답하였다.
전화를 마치고 세 번째 담배를 물었다.
‘불길한 징조들은 현실화되는구나.’
내가 곧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현실이 좀처럼 다가오지 않아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받아들이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고맙게도 수십 년 동안 익혀온 나만의 스트레스 극복 메커니즘(마인드 컨트롤)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자동적으로 가동되었다.
고교생 시절부터 나는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상처를 받아 몸과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그렇게 계속 살아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만의 스트레스 극복법을 만들고 오랫동안 꾸준히 실천해 왔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이슈가 아니면 잊어버리자•지워버리자'. 현실 도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살아남아온 방법이다.
회사의 결정을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현실로 받아들이니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담담해졌다.
'후배들에게 죄인처럼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내 자리로 돌아와 부서의 구성원들을 쭉 둘러보니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경험상 알고 있다. 본인의 의지와 달리 회사를 나가야 하는 임직원은 그 소식을 당사자가 제일 늦게 알게 된다는 것을.
다행히도 나의 경우에는 회사에서 보안을 잘 지켜 주었나 보다. 나는 그런 비참한 주인공이 되기 싫었다.
대표이사 면담까지 약 20분.
대표이사가 할 이야기는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2가지를 머릿속에 정리하였다.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입고 한 층 위에 있는 대표이사실로 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직원들의 일상적인 아침 인사가 새삼 반갑게 느껴진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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