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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uCHO Feb 08. 2024

제4화_도망치듯 회사를 떠나고 싶지 않아

대기업 임원의 아름다운 퇴임과 부활 이야기


해임 통보를 받은 내가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서 갑자기 요청사항이 있다는 말에 다소 당황한 듯하다. 아침의 짧은 시간 동안 정리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대표님. 제가 요청드리고자 하는 첫 번째는 이번 임원 인사에 대하여 보안 유지 부탁 드립니다. 저의 퇴임 소식을 부서원들에게 제가 직접 이야기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짧았던 아침 시간 사무실과 흡연장에서 나를 대하던 직원의 말과 표정에서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는 확신을 했다. 그래서 계속적인 보안을 요청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HR실장에서 전무님이 부서원들에게 어나운스 하기 전까지 보안 유지 철저히 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뭔가요?"

"쉽지 않은 요청입니다만, 2주 동안 저의 보직을 유지시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주 동안 보직 유지하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30년 근무하는 동안 퇴임하는 임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2가지 의문이 내 마음속에 싹트면서 점점 커져갔다. 임원이 되고 나서는 현실적인 의문으로 자리 잡았다.


첫 번째, 퇴임 임원이 본인 소식을 제일 늦게 접한다는 것. 인사 정보는 보안이 생명인데 왜 본인만 모르고 있다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사는 것일까? 주위 사람들은 이미 알고 눈치를 보는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까?


두 번째, 해임 통보를 받은 임원은 왜 죄인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떠나야 하는가? 비리를 저질러 문책성 해임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왜 도망치듯 쓸쓸히 사라져 가야 할까?


임원은 회사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지위를 누려 왔지만, 회사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비록 회사를 떠나게 되더라도 퇴임 임원은 회사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은 그간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아름다운 퇴장은 할 수가 없을까?


해임 통보를 받는 자리에서 내가 대표이사에게 요청하는 2가지는 위의 의문을 해소하고 싶은 나의 희망이자 임원 퇴임 문화를 바꾸어보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대표이사의 질문에 답하였다. 지금까지 퇴임 통보받은 임원이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습이 싫었고, 나는 2주 동안 당당한 모습으로 회사를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보직 유지 2주 동안 부서의 주요한 의사결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차근차근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임원의 아름다운 퇴장 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전무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다른 계열사 상황 체크하고 최종적으로 HR실장을 통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전무님이 회사에 기여한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대표이사실을 나오니 HR팀장이 기다리고 있다. 예정된 수순이다. 해임을 통보받은 임원에게 이후의 일정과 프로세스를 안내해 준다.


HR팀장과 함께 대표이사실 입구 쪽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HR팀장이 정리된 문서를 테이블 위에 놓고 설명을 한다.


"전무님은 오는 1월부터 '비상근 고문'으로 선임되어 2년(1+1년) 간 그에 해당하는 급여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근무기간이 이번 주까지라고 했는데, 조금 전 대표님께 요청드린 사항이 있으니 확인해 주세요."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HR팀장이 알겠다고 답한다.


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에 들어갔다. 부서의 주요 리더들인 그룹장(임원) 2명과 선임 팀장에게 지금 바로 미팅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선임 팀장은 오전 반차여서 결국 나를 포함한 3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아침 이른 시각 예정에 없던 회의 소집에 그룹장 2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온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전달하니 그룹장 2명 모두 당황함과 심각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 같아 회사의 보안 유지에 고마운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나만 모르고 있는 바보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이사에게 2가지를 요청하였고, 둘 다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하였다.


"여러분도 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보안 유지해 주세요. 팀장을 포함한 부서원들에게는 내가 직접 메시지를 정리하여 다음 주 월요일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그룹장 2명 모두 알겠다고 답한다.


금요일인 내일은 지방 출장이 있다. 오는 일요일까지 보안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3일간이라는 기간이 조금 꺼림칙하다.


퇴근할 즈음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떨린다. HR실장의 전화다.


“전무님. 대표님께 요청하신 2가지 사항 모두 말씀하신 데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회사에 그런 요청을 한 임원은 없었다. 내가 희망했던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염화칼슘이 뿌려진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순식간에 형체가 없어지는 ‘눈’이 되기 싫었다. 흙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서서히 녹아가는 그런 ‘눈’이 되고 싶었다.




다음 예정 글 : 제5화_회사와 공식적인 아름다운 이별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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