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사랑의 무늬, <오키쿠와 세계>
영화전문잡지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가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일본영화 〈오키쿠와 세계〉. 일본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키네마 준보>는 매년 그 해의 영화 ‘베스트 텐’을 발표한다. 2023년 <키네마 준보> 선정 ‘베스트 텐’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작품이 선정되었는데, 〈오키쿠와 세계〉가 ‘베스트 텐’ 가운데 최고의 영화로 뽑혔다.
〈오키쿠와 세계〉는 ‘똥’이라는 매개를 통해 세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를 보여준다. 이렇게 똥이 존재감을 가진 영화는 이제껏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 편의 시(詩)처럼 아름답다. 스토리보다 시적인 영상과 아포리즘 같은 대사들이 영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선(禪)적인 음악 또한 시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아버지를 구하다 목소리를 잃고 혼자 남겨진 오키쿠와 똥통을 짊어지고 이리저리 떠밀리듯 살아가며 절망의 바닥을 뒹굴면서도,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사랑이 되어주는 세 젊은이의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마음에 담기는 영화이다.
1. 세계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어떤 곳인가. 세계 속의 인간은 어떠한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오키쿠와 세계>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영상이라는 바퀴를 굴려간다. 그런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골치 아픈 질문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우리를 품고 있고, 우리가 세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쿠와 세계>는 ‘모든 것은 끝없이 순환하며, 그것이 세상이다’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8개의 짧은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똥통에 가득 들어 있는 똥을 푸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노점에서 음식을 먹는 남자에 대한 장면으로 출발하는 영화의 시작은 바로 영화 전체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똥’과 ‘먹는다’는 행위가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을, 그것이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똥’은 사회의 평등과 차별을 동시에 담고 있는 물질이며,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대한 거대한 비유이다. 인간은 누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먹어야 살 수 있고, 먹은 것을 소화하여 내보내야 살 수 있다. 이것이 ‘똥’이 내포하는 ‘평등’이다. 하지만 인간은 똥을 천대하고 똥 푸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가진 것도 없고 가족도 없이 맨몸 하나로 세상을 뚫고 가야 하는 야스케와 츄지 같은 사람들.
2. 야스케
에도시대 말기 가장 천한 일을 하며 밑바닥에서 가족도 없이 자기 몸 하나로 세상을 뚫고 살아가는 야스케. 살아남기 위해 가끔은 고객에게 건넬 똥에 물을 섞는 편법을 쓰기도 하고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대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사람들이 업신여겨도 그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일의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 모순과 불합리를 꿰뚫고 있다. ‘가난한 농부는 물만 마실 자격이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야스케. 그것은 절망이지만 그는 그래도 절망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순수하고 올곧은 츄지에 비해 이런 야스케의 모습은 비루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자신을 먹여 살리는 더러운 배설물을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똥’이라는 물질을 다루면서 세상의 이치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그것은 글을 읽고 배워서가 아니라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터득한 진실이다. 그는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 속에서 편견과 모순과 차별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보다 더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야스케는 사람들이 발설하기를 꺼려하는 것에 대해 거침없이 직구를 날린다. 신분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지만 똥을 배설하는 일은 누구나 매일매일 하는 일이다. 똥은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생명 유지의 조건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없듯, 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세상은 똥처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똥이 넘쳐흘러 천지를 더럽히는 영화 속 장면처럼. 그러나 더러움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은 절망이지만 야스케는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세상은 똥이야.”
3. 그리고 사랑
그리고 오키쿠가 있다. 오키쿠의 절망이 있고 오키쿠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번쩍거리는 사무라이의 대저택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초라한 방으로 ‘종이 꾸러미’를 들고 찾아온 사내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종이’는 글을 읽고 쓰는 오키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다. 츄지가 건넨 ‘종이’에 글을 쓰며 오키쿠는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올 힘을 얻는다.
오키쿠가 츄지에게 가져다줄 밥을 짓기 위해 아침부터 무를 다듬는 모습을 담은 장면에서 오키쿠 목의 상처가 클로즈업되고, 츄지가 그녀를 위해 주고 간 ‘종이’가 비친다. 그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이다. 세계 속에서. 상처와 사랑과 모순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밥을 가지고 츄지를 찾아가는 오키쿠. 오키쿠는 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만, 츄지는 선뜻 그 마음을 받지 못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 신분 따위 상관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오키쿠에게 츄지는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말로는 못하겠다면서’ 말을 할 수 없는 오키쿠처럼 손짓 발짓으로 고백한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는 사랑에 대해, ‘몸의 언어’로 말한다.
츄지가 손짓 발짓으로 표현하는 몸짓 언어는 말보다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마치 영상으로 전달하는 것이 문자로 쓰인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처럼.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츄지는 고백한다. 사랑하는 시간에도 세계는 계속 흘러간다. 끝이 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 사랑이 있다.
4. 게 눈 속의 연꽃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사람 인)’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지지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키쿠와 세계〉에 등장하는 세 젊은이는 세상 가장 밑바닥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여 준다. 오키쿠와 츄지가 그렇고 츄지와 야스케가 그렇다. 세상은 똥간 천지지만 그런 사람의 숨결이 있기에 우리는 똥간 천지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흑백 모노톤의 ‘시 한 편’을 영상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오키쿠와 세계〉를 보며 오래전 읽었던 황지우의 〈게 눈 속의 연꽃〉이란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게 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 / 보광(普光)의 거품인 양 / 눈꼽 낀 눈으로 /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 /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황지우의 시처럼 영화는 똥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 피어난 연꽃을 보여준다. 그 연꽃은 더러운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세상 속에 없는 연꽃을,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오키쿠와 츄지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구차한 서사를 과감히 생략해 버리자 그 사이에서 여백이 생기고 매력적인 시적 울림이 퍼진다. 죽은 아버지와 목에 상처를 입고 피 흘리며 헐떡거리는 오키쿠가 나오는 장면. ‘그리고 배는 나아간다’ ‘바보 오키쿠’ ‘두 바보’ 등의 장 제목도 시적 울림을 준다. 각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한 컷의 컬러 장면은 무미건조한 시간 속에 인간의 온기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쿠로키 하루가 ‘오키쿠’ 역을 맡았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에는 섬세한 감정의 숨결이 들어 있다. 키키 기린과 함께 나오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도 좋았고, 요리 드라마 ‘정성을 다해 요리첩’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영화 미학자 랑게는 예술의 본질은 자연 속에 있지 않고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만든 환상에 있다고 말했다. 랑게의 말이 〈오키쿠와 세계〉처럼 잘 들어맞는 영화가 어디 있을까. 수많은 장면이 똥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영화는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詩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