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예쁜 언니 명팔 여사는《소리의 황홀》《생활명품산책》《잘 찍은 사진 한 장》을 쓴 윤광준의 40년째 애인이자 친구이자 엄마이며, 마누라이고 부인이고 아내이다. 명팔 여사는 윤광준의 모든 역사이다.
열아홉 살 대타로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윤광준을 만나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 아름답고 거룩하고 찰떡같고 폭풍 같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명팔 언니를 처음 본 것은 일산 정발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윤광준의 작업실 B1에서였다. ‘B1’은 지하 1층을 가리킨다. 어느 일요일 지인과 같이 들른 작업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명팔 언니를 맞닥뜨렸다. 예쁜 두건을 쓰고 예쁜 앞치마를 둘렀는데 예쁜 두건과 예쁜 앞치마보다 언니는 더 예뻤다. 너무 예뻐 까다로운 공주님이 아닐까 생각했다.
편견이 깨뜨려지는 순간이 관계의 전환을 이루며 봄바람처럼 마음을 살펴줄 행복한 관계로 나아가는 때가 있다. 공주님 같을 거라는 언니에 대한 편견이 깨뜨려지는 순간이 그랬다. 잠깐 본 모습은 잠깐 본 것일 뿐이다. 잠깐 보고 가진 편견이 그렇게 무너지면서 서로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는 또 다른 마법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예쁜 언니는 빛나는 미모와 달리 술도 ‘쎄’고, 말도 ‘쎄’고, 애정표현도 거침없이 ‘쎄’다. 한마디로 대장부 같은 여자이다. 이런 반전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언니는 나의 편견을 뛰어넘는 모습들을 감추고 있었다.
뛰어난 패션 감각에 놀랐고, 집안살림을 ‘아트’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놀라운 재능에 또다시 감탄하였다. 언니에게 집안살림은 자신의 본질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현실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현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활짝 꽃 피우는 모습이다. 언니 집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니의 감각과 손길로 만들어진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오랜 시간 만나면서 언니에게 매우 특별한 구석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비밀’이다. 정확히 말하면 언니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비밀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곱 살짜리 꼬마에게도 상처가 있고 비밀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언니는 비밀이란 게 거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언니는 나에게 윤광준 선생님과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고 곁에 두고 있는 아들의 온갖 이야기를 다 들려준다.
나는 그 점에 대해 곰곰 생각한 적이 있는데, ‘비밀’이 없는 것은 언니의 내면의 힘과 건강함을 이야기해 준다고 결론 내렸다. 겉과 속이, 안과 밖이 거의 비슷한 언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속 다르고 겉 다른 나에게는 늘 미스터리이다.
마음이 괴롭거나 외로울 때 잠깐잠깐 언니 마음에 기대어 선 적이 있었다. 언니의 내면은 아주 튼튼한 돌쇠와 같아서 힘들 때면 거기 잠깐 기대는 것이 편했다. 지난 토요일에도 동네 시래깃국집에서 만나 낮술을 하면서 튼튼한 언니 마음에 잠깐 기대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언니의 마음은 늘 힘이 넘쳐 편안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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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언니를 생각하면서 고른 시. 이상의 〈이런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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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으로 돌아가면, 좀 배웠다고 억지 이론을 늘어놓거나 남녀평등을 외치며 세상 밖으로 나가지 말고, 그저 엄마로서 아내로서 식구를 먹이기 위해 치즈를 만들고, 쇠똥을 태워 고기를 굽고, 또 쇠똥을 갖고 노는 아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싶다. 말을 타고 멀리 나가는 남편을 그저 믿고 기다리고 싶다.
_ 사노 요코 《문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