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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Jan 11. 2024

‘알바로 시자’를 들다

일상에서 누리는 예술의 파격

오랜만에 동네 미장원에 들렀다. 한때는 이대 정문 앞에 위치한 그 유명한 은하미용실에서 커트를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일산에 입성한 이후 대형 체인 미용실인 아이디헤어를 다녔다.  동네 미장원의 수다가 부담스러워 내린 선택이었지만 대형 체인점 미용실은 도떼기시장 같았고, 담당 미용사가 자꾸 바뀌었다. 그래서 다시 선택한 것이 집 근처 미용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동네 미장원의 수다에서 ‘사람 살아가는 냄새’가 느껴진다.      


경력 30년 차 미용사는 손님의 머리를 커트하는 동안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데, 오늘 주제는 그녀가 기르는 반려견 럭키 이야기였다. 남편이 태어난 지 몇 주밖에 안 된 강아지를 생일선물로 주었는데 얼떨결에 1주일을 키우다 포기했다고 한다. 커튼 뒤에 붙어있던 먼지 뭉치나 계란 삶은 것을 먹고 캑캑대는 통에 힘들어서 다시 남편 사업장에서 기르라고 돌려주었다고. 그런데 1주일밖에 같이 살지 않은 강아지가 눈에 아른거려 다시 남편에게 사정해서 데려와 키운 것이 이제 4년째.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 감정을 교감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자식보다 더 사랑한다고 한다. 자식 둘은 이제 커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만 럭키는 자기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면서. 그 럭키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커트 과정은 완성되었다.  

   

미용실을 나오니 이웃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남편인 작가 윤광준 선생님이 만든 신년 탁상용 달력을 주겠다고 해서 만났다. 커피 고수가 맛을 인정한 동네 카페 ‘댄싱 빈’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역시나 안 만나는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건 언니가 들고 나온 에코백이었다. 카페에서 언니의 에코백을 보는 순간 놀랐다. 저렇게 파격적인 그림이 있는 에코백을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누드가 그려진 에코백이라니! 이런 에코백을 어디서 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니 남편인 윤광준은 대구의 한 철강회사 창업주와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윤광준 선생님이 쓴 오디오에 관한 책《소리의 황홀》을 읽고 직접 연락을 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껏 사적으로 공적으로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함께 몽골 여행도 다니고, 정원에 관심이 많아 일본 정원을 함께 탐방하셨다는 이야기도, 가끔 지인들과의 와인 파티에 초대받아 다녀온 이야기도 들었다.  예술가의 재능을 높이 사 그를 후원하던 중세 패트런 같은 관계의 측면도 있는 것처럼 보여 이웃에 사는 훌륭한 작가와 성공한 기업가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흐뭇하였다.   


올해 초에 윤광준의 오랜 팬이자 패트런인 대구의 철강회사 회장이 주최한 신년음악회에 다녀왔는데, 음악회 참석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이 에코백을 주었다고 한다. 400개 한정판. 에코백에 프린팅 된 파격적인 작품을 그린 작가는 포르투갈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알바로 시자(Alvaro Siza). 건축 분야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건축물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파주의 미메시스아트뮤지엄과 아모레퍼시픽 용인연구소, 안양 파빌리온이 그것이다.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알바로 시자의 누드작품이 그려진 에코백을 남편이 누워서 잘 볼 수 있는 침실 한편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이런 깨알 같은 배려와 사랑이 언니 커플의 오랜 관계의 비결이다. 언니네 식구는 셋이다. KBS 개그맨으로 데뷔해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인기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에서 ‘죽는 건가’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코미디언 아들과 함께 사는데,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언니네 집 일들을 나 혼자 듣고 묻어두기에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웹툰을 만들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만 한다.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밀담을 거침없고 솔직하게 꺼내어놓는 언니 가족 이야기를 들으면 가족이 원래 그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 담긴 에코백.   ⓒ 이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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