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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Feb 21. 2024

매력적인 고기능 알코올 의존자

알코올 중독자 앞에 ‘매력적인’이라는 수사를 덧붙일 수 있을까. 캐럴라인 냅과 이윤기라는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그럴 수 있다. 캐럴라인 냅과 이윤기는 ‘매력적인 알코올 중독자’이다. 아니, ‘매력적인 알코올 중독자’였다. 둘 다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쓴 작가로 유명한 이윤기 선생님을 생전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그분이 술을 즐기는 것을 넘어 술에 얼마나 붙들려 사는 사람이었는지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보적인 베스트셀러로 장안에서 주가를 올릴 무렵 이윤기 선생님은 한 병에 30~40만 원을 주어야 살 수 있는 ‘조니워커 블루’를 매일 한 병씩 드셨다고 한다. 함께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말에 따르면 전날 술자리에서 취하도록 마신 다음날 아침 해장하러 간 자리에서 소주부터 시키셨다고.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과천 댁에서 뵈었을 때 선생님은 예전의 건장한 체구를 잃으신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모님 몰래 책장 사이사이에 술을 숨겨두고 마셨다고 한다.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그토록 알코올에 붙들린 이유를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이윤기 선생님은 술과 헤어져서는 살 수 없는 중독자였지만, 술자리에서 품격을 잃지 않으셨고 죽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적인 작업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매력적인 알콜릭’이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선생님은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일흔까지는 살고 싶다고 하셨다. 쓰고 싶은 글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은 일흔을 못 채우고 63세로 정말이지 어느날 훌쩍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쓴 작가로 많이 알려졌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글도 좋지만, 나는 이윤기 선생님의 산문과 ‘나비넥타이’ 등의 단편소설을 더 좋아한다. 삼십대 초반 선생님의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을 읽고 너무 좋아 몇 번이나 거듭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담을 진솔하게 쓴《드링킹》이란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캐럴라인 냅의 글은 우아하고 섬세하며 깊은 맛을 지닌 와인 같다. ‘고기능 알코올 의존자’라는 말은 캐럴라인 냅의 책에서 알게 된 것이다. 캐럴라인의 글이 특별한 것은 그녀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테마를 다루면서 자기 삶의 문제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과 감정의 문제들을 섬세하게 짚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캐럴라인 냅의 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캐럴라인 냅의 글에서 위로를 얻은 것은 참으로 엉뚱한 부분이었다. 그녀가 자기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과 환상, 심리치료 이야기, 우울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나의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유능한 정신분석가였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심연과 고통에 대해 정신분석적 이해가 가능했던 아버지를 둔 딸이 그토록 우울에 시달려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그 어두운 터널을 힘들게 빠져나온 경험을 글로 기록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상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이제껏 내가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내 내면의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갇혀있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내가 가진 내면의 불안과 고통, 깊은 슬픔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나의 견고한 확신에 균열을 가한 것이다. 캐럴라인 글에서 얻은 내 확신의 균열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어서 도망치라고 유혹하는 술이 있다. 술을 마시면 고통과 외로움과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과 슬픔은 잠시 자리를 피한 것이다. 고통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슬픔 때문에 술을 찾는 일이 반복되면 조만간 술 때문에 고통받고 외로워진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다.          


***     


마취제 없는 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 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반복하여 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 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 _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224p)     


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게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 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삶을 살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_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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