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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Feb 15. 2024

겨울을 마감하는 별미

백간장과 맛술이 어우러진 은은한 굴조림

찬바람이 코끝을 아리기 시작하면 집 근처 생협에 매일 드나드며 굴이 나왔는지 체크한다. 자연산 굴을 사기 위해서다. 11월 중순경이 되면 생협에 하루에 1~2통씩 자연산 굴이 들어온다. 동해안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굴을 먹어본 적이 없다. 굴을 처음 먹어본 것은 회사 다닐 때 시청 근처 해장국집에서 굴국밥을 먹은 것이 처음이었고 한참 지나 생굴을 초장에 찍어먹었다. 미끄덩한 식감에 비릿한 향을 내 혀는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굴은 회로도 먹고, 전으로도 먹고, 젓갈로 담가 먹기도 하고, 무채에 슬쩍 끼워두면 무와 같이 익으면서 독특한 맛이 생기는데 무채에 몸을 담궈 삭혀진 굴을 좋아한다. 고춧가루와 양파와 파로 갓 무친 굴은 참기름을 떨어뜨려 먹으면 비릿한 맛이 사라져 좋고, 시간을 품은 어리굴젓은 삭혀져 깊으면서 큼큼한 맛이 좋다.     


굴무침이 뽀송뽀송한 연한 아기 볼이라면 어리굴젓은 폭삭 늙은 할매의 젖이다. 어린시절  여름이면 소나무숲 평상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은 죄다 난닝구 하나만 걸치고 부채를 연신 부쳐댔는데, 그때 봤던 시골 할머니들의 축 늘어진 젖이 생각난다. 힘든 세월을 통과하면서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젖가슴이 무너지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몸에 매달려있던 슬픈 할매들의 젖. 세월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이제는 꼼짝없이 제자리에서 무화(無化)되어 버릴 일만 기다려야 하는 할매들의 젖은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는 것처럼 슬프고 애잔했다.     


오래전 친구와 무창포에 간 적이 있다. 썰물 때가 되어 바다에 길이 나자 사람들이 그 길을 건너갔고 길의 중간에는 생굴에 소주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자연산 굴을 그 자리에서 까서 소주와 함께 팔았는데, 생굴에 소주 한잔 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굴맛을 모르던 나는 거절했다. 친구 혼자 소주에 굴을 먹었는데, 훤한 하늘을 이고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서 먹은 굴맛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굴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굴소스에 관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런던에 체류할 무렵 친구가 한국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왔다. 친구도 보고 영국 여행도 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직장을 가지지 않고 집순이로 살던 소설가 친구는 도마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와는 달리 웬만한 요리들은 척척 쉽게 해내었다. 친구가 오고 난 이후 식사를 전부 친구에게 의지했다. 어느 날 저녁 친구는 볶음밥을 하겠다면서 양파를 비롯한 야채를 다듬어 썰고 볶음밥 재료들을 준비한 뒤 굴소스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에 ‘굴소스’라는 신기한 요리도우미가 있다는 것을!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던 내가 굴소스나 참치액젓 같은 음식재료를 알 리 없었다. 친구는 볶음밥에는 굴소스가 들어가야 한다며 굴소스를 구해오라고 했다. 굴소스없이 하면 볶음밥을 만들면 안 되느냐는 내 말에 벌컥 화를 내던 친구의 모습이 이해할 수 없어 한바탕 우리는 감정의 대치전을 벌였다.     


이제 집 냉장고에는 굴소스뿐만 아니라 어간장, 맛간장, 쯔유, 참치액젓, 데리야끼 소스 등 많은 요리재료가 늘 대기중이다. 냉장고에서 굴소스를 꺼낼 때마다 그때 친구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최근 술꾼들에게 매우 유용한 ‘스시 장인 35인이 알려주는 161가지 술안주’ 정보가 담긴 《스시 마스터》란 책을 보았는데, 이 책에 실린 ‘굴 조리기’를 보는 순간 궁금하여졌다. 백간장에 조린 ‘굴조림’의 맛은 어떨런지.      


굴이 스시 재료로 등장한 것은 굴 양식이 가능해진 현대에 와서라고 한다. 백간장과 설탕으로 만든 조림장에 굴을 살짝 데친 후 식혀 먹는 굴조림은 일본식이다. 스시처럼 백간장으로 만든 ‘굴조림’도 은은하고 섬세한 음식으로, 사케와 잘 어울리는 안주이다. 어리굴젓도 좋지만 굴무침도 좋지만, ‘굴조림’은 한층 우아하고 고급스런 맛의 변주를 지니고 있다.     


《스시 마스터》에 나오는 ‘굴 조리기’ 코너를 통해 백간장이란 것을 처음으로 알았는데, 백간장이라고 해서 ‘하얀’ 간장이 아니라 연한 노란빛을 띤다고 한다. 일본 아이치현 특산품인 백간장은 아주 소량 만들어지는 특수 간장으로, 굴과 이리(이리_수컷 물고기의 정소) 등 재료 본연의 흰색을 살리고 싶을 때 사용한다.      


백간장을 당장 구할 수 없으니 쯔유와 간장 소량을 사용하였다. 1분 정도 데친 굴은 생굴과 달리 살짝 단단해진 식감이어서 물컹한 생굴보다 기분 좋게 입 안에서 리듬을 탔다. 아아, 이렇게 처음 맛보는 품격있고 매력적인 술안주에 ‘쿠보다 준마이다이긴죠’가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호사스러운 술자리가 되었을까. 동네 오라버니 환갑을 기념하며 마셨던 ‘쿠보다 준마이다이긴죠’의 잊을 수 없는 그 맛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백간장 대신 쯔유와 간장, 맛술로 조림한 굴. 슴슴하게 매력적인 술안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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