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간에서 점검하는 나의 모습, 《융, 중년을 말하다》
책의 운명이 있듯이 어떤 책을 어떤 시기에 읽게 되는 특별한 ‘때’가 있다. 정신분석가 대릴 샤프가 쓴 《융, 중년을 말하다》가 나에게 그런 책이었다. 가까웠던 친구가 기획하여 번역한 책으로 출판기념회를 겸한 술자리에서 친구에게서 받은 책이다. 그때가 2008년이었는데, 책을 받고서 앞부분만 조금 읽다가 책장에 꽂아 두었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야기 형식을 차용한 전개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책장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를 지키던 이 책을 최근 갑자기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마치 이 책은 지금 내가 맞닥뜨린 문제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에게 지금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직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지금껏 책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이 책을 번역한 이는 나에게 특별한 친구였다. 그 특별함이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학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친구와 나는 거의 비슷한 무렵 동아리에 들어왔고 같은 학번의 여학생은 우리 둘 뿐이어서 늘 가까이에 있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신세 진 적도 있었고, 요리에 서툰 자취생이 안타까워 가끔 집에 불러 집밥을 먹게 해주기도 했다. 가까이 지내다 보니 친구의 아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단독주택에 살 만큼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던 친구에게는 의외로 복병 같은 상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엄마와의 불화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모녀 갈등이었다. 그것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친구에게 너무 깊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늘 불안했다.
친구는 대학 졸업 후 딱 3일을 출근이란 것을 하여 일한 후 집거하면서 소설을 쓰더니 어느 날 국내 유수의 문학출판사에서 등단을 하고 책을 출간하였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치유상담 모임에 나간 것이. 나를 그 모임에 초대하여 몇 번 친구가 집단상담을 하는 멤버들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상담이니 심리학이니 정신분석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집에서 독립해 살았고 그 무렵 내 생활은 자유롭고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내 삶에 큰 변화가 있고 마흔 중반 무렵 나는 심각한 내적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여기서는 세세히 말할 수 없지만 그때의 심적 위기로 인해 나는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받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 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토록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그토록 솔직할 수 있는 나를 만나던 시간도 처음이었고, 누군가에게 그토록 나를 열어 보여주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기회가 되면 나는 다시 한번 그런 시간을 만나고 싶다. 내 분석가가 나에게 대했던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를 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공감하는 일, 그렇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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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행복했던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은 중년의 노만이 정신분석을 받으며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되고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가 정신분석가이기에 분석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사실적이다.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분석과정에서 분석가의 심리가 이야기되는 부분이었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분석 과정에서의 분석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이것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묘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응급과 의사인 남궁인이 자신의 체험을 글로 풀어낸 《만약은 없다》라는 책처럼, 《융, 중년을 말하다》도 저자의 실제 경험을 각색하여 글로 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었던 이 책을 최근 갑자기 읽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일인데, 아마 지금 내 상황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무의식의 인도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교육받으며 사회화되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탐구할 기회를 잃은 채,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모르는 채 살아간다. 이러한 진정한 자신과의 불일치는 어느 정도까지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그것이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든 순간이 온다. 그때가 바로 위기이자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면서 진짜 자기의 본질을 알고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M.B.T.I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흥미로웠다. 그에 따르면 이 테스트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섬세함이 부족하고, 인간의 마음의 역동성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테스트는 한 사람의 성격 유형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숙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본질과 불화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인간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때 우리는 행복하고, 우리의 삶과 죽음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토대를 만든 융에 따르면 “우리의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이 책은 무의식과 그것을 다루는 정신분석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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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절들
그가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인식하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어나는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배우자와의 갈등은 자신의 심리적인 갈등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 안에 있는 심리적 갈등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가 격렬한 감정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콤플렉스가 작동할 때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이 집단 안에서 우리가 맡은 일이나 역할과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럴 경우 페르소나는 우리의 사회 활동을 도와주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된다.
사람들의 관계에서 동일시는 아주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동일시를 한다면 내 감정상태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결국 내 감정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천국으로 가기도 하고 지옥으로 가기도 한다.
관계는 책에 쓰인 이론을 가지고 토론할 때가 아니라 감정을 나누고 이해할 때 풍성해진다.
“너는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어.”라고 다른 사람을 탓을 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나는 지금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내 안의 무엇이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가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골칫거리를 만들어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마음속에 담아둠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
관계를 잘 유지하는 비결은 자신의 콤플렉스로부터 떨어져 그것을 객관화하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맞서는 것이다. 콤플렉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자신의 순수한 감정과 콤플렉스가 활성화될 때 치솟는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콤플렉스에 저항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미지대로 그가 행동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일이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감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악마,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사람들이 심각하게 싸우는 것은 서로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