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단어의 정의부터가 말해주고 있다.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 욕망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더 많은 것을 탐하게 되며, 아무리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도사랑에 목말라한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욕망을 사슬처럼 발목에 달고 산다.
나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을까. 생각해 보니 놀랍게도 내가 탐한 것은 타인의 인정이었다. 돌이켜보면 난 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써왔다. 인격, 지적 능력, 물질적 풍요, 외적인 아름다움. 내가 봤을 때는 난 다 부족했다. 하지만 남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전래동화 속 주인공처럼 나는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나보다 잘난 사람 투성이었고, 늘 전정 긍긍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바라는 대로 살게 되면 욕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은 안갯속에 휩싸인 것처럼 좀체 명확해지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 건왜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거다.
그저 막연히 그려지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이었다. 재력이, 인품이, 학식이, 능력이, 배우자나 자녀가 누구나 부러워할만해서 모두의 경외를 사는 삶. 써보고 나니 말 같지 않은 소리다.진짜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나의 불행은 내가 진정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는 데에서 왔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제각각의 사람들이 탐하는 것들을한 가지로 압축해 보자면 이게 아닐까. 원래의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 그런데 어떻게 원래의 모습보다 '더' 괜찮아 보일 수가 있을까? 그리고 '더' 괜찮은지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걸까? 명확한 기준도 잣대도 없으니 서로 그저 지금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판단받는다.
나에게 지금 단 하나 줄어든 욕망이 있다면 바로 소비욕이다. 수 없이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텅장이 된 후 깨달은 것은 물건만으로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명확한 목표를 세워야 했고 그것은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남보다? 아니. '과거의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목표가 생기니 욕망이 구체화됐다. 모아야 할 돈과 수익률이 구체화되었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를 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소비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들이 이제는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살아가고 싶은 욕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오래도록 무탈한 일상을 함께하고픈 욕망, 더 깊은 사고와 더 넓은 만남으로 나의 세계를 넓혀가고 싶은 욕망.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욕망할 때 나만의 기준이 생긴다.그것은 남들이 심어준 욕망, 남들것을 베낀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니기에 비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양껏 욕심부리며 살 테다.
욕망 때문에 우울하고 소외감이 든다면 생각해 보자. 내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 이득을 보는 사람이 타인인지 아니면 나인지. 타인의 귓가에 부족함을 속삭이는 사회가 아니라 자기만의 기준으로 건강하게 욕망하기를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욕망 때문에 우울함과 소외감을 느끼는 대신 욕망 때문에 희망과 소속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할 것인지내가 진짜 바라는 것을 알고 이 판을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인지, 선택은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