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는 러너다.
하루키는 어디서나 달리는 건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가끔씩 정해진 길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의 여유는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상쾌함과도 비견된다고 말한다.
#이토록작지만확실한행복_무라카미하루키
어쩌다 마라토너가 된 지 3년 째의 햇수이다. 그 사이 마라톤을 6번 완주했고, 4시간 9분의 완주 시간을 3시간 41분으로 당겨 서브 4 주자가 되었다.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해 왔고 여기까지 성취감을 맛보며 달려온 셈이라고 위안할 수 있는 정도이다.
“자, 이제 3년 차 러너가 된 나는 어떤 러너로 성장하고 싶은가?”
어느 날 문득, 달리던 길 위에서 나 자신에게 묻고 있는 나를 깨닫는다. 지금까지는 그저 즐겁게, 또한 나름의 도전을 하며 이어온 달리기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달리며 맞이한 세 번째의 여름 앞에서 조금 지친 마음이 들었다. 어떤 변화나 동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지친 마음의 연장선에서 문득 내가 어떤 러너가 되고 싶은 지 나 자신에게 묻게 된 것이다.
“달리기와 존재라기”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인 조지 쉬언은 일찍이 달리는 사람을 조거(jogger), 레이서(racer), 러너(runner)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다. 조거는 달리기를 즐기며 대회나 기록에 신경 쓰지 않고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써 달리는 사람이다. 레이서는 대회에서의 경쟁과 기록 향상을 목표로 체계적인 훈련에 몰두하는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러너는 달리기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러너는 레이서와 조거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달리기를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달리는 그 자체를 사랑하며 무엇보다 달리기를 통한 자기 성찰에 의미를 둔다.
나는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러너”가 되기를 추구해 왔다. 나에게 달리기는 처음부터 다이어트를 위한 목적으로, 심폐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달리기는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는 그 무엇이었다. 달리기에서만큼은 누구와의 경쟁이나 비교는 필요 없었다. 그저 나만의 발굴림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심장 박동 속에서 리듬감 있게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정도 달렸으면 이 정도 기록은 나와줘야지?‘, ‘저 사람은 나랑 비슷하게 시작했는데 언제 저렇게 빨라졌을까?‘, ’좀 더 빠르게, 더 잘 달리고 싶다!’ 등의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달리기가 가끔은 버거워지고 조바심이 났다. 나는 3년째 달리고 있는데, 3년 전과 조금의 발전(?)도 없는 것 같고 월누계 이 정도 달리면서도 기록은 좋아지지 않는다는 열등감마저 생겼다.
삶의 일부로서 자아 성찰과 나만의 성장을 위한 “러너”가 되기는커녕, 점점 조거도 레이서도 아닌 어정쩡하고 이상한 포지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록이 주는 기쁨도 실망감도 그저 어깨 한 번 으쓱하면 털고 일어나던 나였는데 생각보다 더딘 발전(나는 사실 달리기에 있어서만큼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꺼려지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쓰도록 한다)에 점점 지치는 것 같았다.
기록 향상을 위한 도전과 성장의 기쁨은 마라톤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런데 기록 추구에 매몰되어 달리기의 진정한 기쁨을 놓치는 것도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기록 추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세상 모든 일이 어쩌면 다 이렇다. 내가 좋아서 쓴 글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내가 행복해서 그린 그림이지만 아무도 감탄하지 않는 그림이라면, 창작의 의지는 꺾인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시험은 못 쳐도 상관없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 자신에게 떳떳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어도 결과적으로 시험을 망치면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달리기 기록 추구도 비슷한 것 같다. 지난 대회보다 1분이라도 단축하고 싶은 열망으로 훈련을 하고 힘든 시간도 괴로운 시간도 견뎠지만 막상 그날의 컨디션 저하나 개인의 역량 부족 등으로 대회를 망치면 실망스러운 기분도 들고, 괜히 남과 비교까지 하게 되면 오히려 대회가 즐거움이 아니고 스트레스가 되어 버린다.
아니다.
나의 지친 마음은 그저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라 덥고 지쳐서, 혼자서 뛰어온 시간이 쌓여감에 따른 동기 부족 때문에 등등 누구나 한 번씩 겪는다는 런태기일 지도 모른다. 달리기가 버겁다고 느껴지는 건 날씨 탓일지도 모른다. 가을이 되면 다시 달리기가 즐거워질 것이라며 나 자신을 다독여본다.
오늘도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으며,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 나는 러너다.”
거창한 삶의 성찰도, 나 자신과의 대화도 없다. 그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헉헉대며 뛰는 나 자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오늘은 쉴까 라는 생각이 들어도 달리고 나면 오히려 피곤이 사라진다며 기어이 달리고 있는 한, 나는 러너이다.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한, 나는 러너다.”
당신은 어떤 러너가 되고 싶나요?
저는 그저, 달리기를 말할 때 눈이 반짝이는, 언제든지 달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그런 러너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