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2 max로 측정할 수 없는 러너의 마음.
각종 테크닉과 데이터에 얽매여 달리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냥 아이들이 그러듯, 누구나 어렸을 적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아무 의문도 갖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달리면 된다. 그럴수록 달리기는 더 편해지고 가벼워진다. 그렇게 달리는 이의 달리기는 더 본질에 가까워질 것이다.
#길위의뇌_정세희
요즘 가민 시계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오늘 얼마나 쉬었는지, 회복은 어떤 상태인지, 훈련 강도가 내 몸에 맞는지, 그리고 그 훈련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까지 알려준다. 게다가 잠은 잘 잤는지 수면 시간은 회복에 충분했는지, 더운 날씨에 열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등등 나의 건강까지 챙겨준다. 그뿐인가? 나의 훈련 과정을 분석하여 가을에 있을 마라톤 대회의 예상 기록까지 보여준다. 정확하고, 과학적이고, 똑똑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그 시계가 주는 정보를 신뢰했고, 어느새는 조금씩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숫자들이 나를 돕고 있는 걸까, 나를 조종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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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아침, 날씨는 잔인했다.
습도는 높고 바람은 멈췄고, 뛸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날이었다. 게다가 어제 저녁에 과식을 한 탓인지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은 페이스를 낮추고 가볍게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민은 내게 평소 나의 조깅보다는 빠른 페이스에 다소 긴 시간의 러닝을 제안해왔다
“90분 동안 5:35 페이스로 달려보세요.”
그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다. 오늘 아니면 내일로 밀릴 것 같았고, 괜히 무시하면 나약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달리기를 시작하니 역시 나의 예감이 맞았다. 심박은 평소보다 높았고, 다리는 무거웠다. 그래도 나는 워크아웃을 수행하려고 꾸역꾸역 90분을 달렸다. 평소 편안한 페이스에서 시작해서 몸이 풀릴 때까지 천천히 달려주는 스타일이라 5분 35초 페이스를 처음부터 유지하는 것이 다소 힘들었지만 조금이라도 페이스가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면 “페이스가 느립니다” 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시계의 잔소리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날, 그 워크아웃을 끝냈을 때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평소에는 130-140정도의 심박을 보이는 수준의 페이스였지만 그 날은 힘이 들어서 150이상의 심박을 유지하며 달렸다. 더 힘들었던 만큼 보람되게 느껴졌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거야.”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 시계를 보자마자 그런 마음이 확 꺾였다.
운동 효율: -3
VO2max: 하락 -1
순간,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마치,
“너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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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점점 더 내 몸보다 숫자의 평가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시계가 좋다 하면 안심하고, 나쁘다 하면 실망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진짜로 기억해야 할 건 그런 숫자들이 아닐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덥고 무거운 날씨에도 러닝화를 신었던 용기, 힘든 와중에도 90분을 버텨낸 집중력, 페이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의지, 그리고 달리기를 마치고 나에게 했던 조용한 칭찬이 아니었을까.
그런 것들은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측정되지 않는다.시계는 심박수는 측정해도 이런 나의 의지나 마음의 결심은 계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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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숫자가 아니다. 기계의 숫자를 참고하되, 나를 평가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나의 운동 능력은 VO2 max 하나로 평가될 수 없고, 나의 오늘의 운동에서 얻은 것이 운동 효율 점수로 다 표현될 수는 없다. 나는 오늘도, 나를 믿고, 달릴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이여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러닝화를 신는다. 나만의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시계는 손목에, 판단은 내 마음에 두고 자유롭게 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