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세상 Oct 28. 2023

어머니와 함께 살기(5)

    엄마의 농사

햇살이 너무 좋아 옥상의 고추들이 다 죽었겠다고 보러 올라가신 어머니가 환한 얼굴로 들어온다. 손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를 한 주먹 들었다.

   “야야, 옥상에 고추가 하얗다. 하얗게 꽃이 가득 피었어. 빨간 고추는 더 이상 안 나와도 10월까지 푸른 고     추는 많이 따먹을 수 있겄어.”

캐나다에서는 맛보기 힘든 아삭아삭한 풋고추가 좋아서 끼니마다 두어 개씩 된장에 찍어 전채요리처럼 먹는 나에게 앞으로도 한동안 풋고추를 공급할 수 있어서 기쁘신 모양이다.


아파트 뒤 공터에 일군 텃밭은 어머니가 이 집에 사신 지난 20년 동안 어머니의 일상에 생기와 즐거움을 불어넣어 준 소중한 존재였다. 해마다 열무와 쪽파, 고구마, 무, 고추, 상치를 길러 이웃과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즐거움으로 사셨다. 시에서 모종과 자연비료, 환경친화적 약도 보급해 주니 어머니로서는 더욱 신이 날 수밖에. 연세가 들면서 조금씩 밭을 포기해 이젠 얼마 안 남았다고 하시는데 내가 보기엔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을 키우고 계신다. 요즘은 기운이 달려 밭을 일굴 수가 없어서 이제 밭에는 매년 저절로 자라는 고들빼기만 무성하다. 밭 한쪽에 열무만 조금 심었다. 대신 플라스틱 화분이나 스티로폼 상자에 흙을 담아 파와 고추, 가지를 심어 밭 주변과 옥상에 올려놓고 돌보고 있다.


내가 온 뒤로 어머니는 벌써 열무김치와 고들빼기김치, 파김치를 담아 먹어 보라고 내어 놓으셨다. 연하고 부드러운 열무김치도 좋지만 오랜만에 먹는 고들빼기와 파김치는 내가 엄마 집에 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 나게 해주는 음식이다. 매일 밭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그릇에 조금씩 솎아 오는 채소들이 밥상을 풍성하게 한다. 문제는 어머니가 밭에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거나 집에 올라온 뒤에도 가져온 채소들을 다듬느라 한 시간씩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다. 등 의자를 가져다 엄마의 엉덩이 밑에 밀어 넣어드리고 너무 오래 그러고 계시면 또 허리 아프다고 잔소리를 하지만 일이 눈앞에 있으니 그만 둘리가 없다. 나는 되도록 어머니 하는 밭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내가 거들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일일 목표량이 그만큼 늘어날 것이므로) 어머니도 나의 냉정함에는 익숙한 탓이라서 그런지 당연하게 여기고 기대도 안 하시는 눈치다. 그래서 염치없게도 나는 어머니가 농사지은 채소로 맛있는 김치와 나물을 즐기기만 하며 지낸다. (물론 설거지와 뒷정리 정도는 해 드린다.)


실익이 별로 없어 재개발 계획도 세워지지 않는 오래된 이 아파트가 우리 어머니에게는 천생연분 정말 고마운 곳이다. 아침 6시면 밭에 내려가 같이 농사짓는 친구 몇 분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일도 함께 하는 이 아파트는 비록 낡긴 했지만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주는 만큼 우리 자식들에게도 더없이 고마운 보금자리이다.

사실 전북 장계 산골에서 자란 어머니지만 아버지와 혼인 후에는 줄곧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이런 취미와 기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길에서 죽어간다고 누가 버리려고 내놓은 화분을 보면 하나씩 들고 와서 되살려 내고 예쁜 꽃을 피우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계시긴 했다. 어떤 때는 집 거실과 베란다가 주워다 기른 각양각색 꽃 화분으로 넘쳐나기도 했다. 그 재주가 땅을 만나니 마음껏 실력발휘를 해서 아무도 손대지 않아 황량했던 아파트 입구 화단이 철마다 피는 꽃으로 화려하게 단장을 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단장을 곱게 하고 일터로 출근하듯 밭으로 가신다.

머리는 곱게 빗어 넘겨 고무줄로 묶고 집게 핀으로 뒤 꼭지에 딱 붙인다. 옆머리는 실 핀 세 개로 양쪽에 고정시키고 반짝이 구슬장식이 달린 너른 머리밴드로 마무리를 한다. 다리와 팔에 두 겹의 토시를 끼고 긴 바지와 긴소매 웃옷으로 모기떼를 막기 위한 완전무장을 하고 밭으로 가신다. 하루 한두 시간씩 집과 밭을 거니는 이 일정이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운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계단 조심해서 다니시라는 말씀을 드릴 뿐 말리지는 않는다.

집을 1층으로 옮겨드릴까 물어도 어머니는 3층이 좋다고 하셨다. 1층은 어둡고 3층이 훤허고 답답하지 않아서 낫다고 하신다.

문을 나서며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나는 아침 이 시간이 젤 좋다. 밭에 가서 내 새끼들 얼매나 자랐나 보고 바람도 쐬고 그러니께.”

아침 이 시간이 젤 행복하다는 어머니 말에 끌려 따라나섰다. 내가 따라나서자 어머니가 신이 났는지 현관 입구 꽃밭이 봄, 여름에 얼마나 화려했는지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신다.

(아래 사진은 어머니가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을 내게 전송하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내게 전송해 준 사진들이다.)


추석이 지나자 바람이 완연히 다르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어머니는 벌써 긴소매 원피스로 갈아입으셨다. 오후 운동 삼아 옥상에 올라가는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고추대위에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다.

 어머니가 고추 화분 사이를 들여다보며 빨갛게 익은 고추가 있나 찾는다. 하나씩 따서 가져온 비닐봉지에 넣는다. 오늘 수확은 빨간 고추 5개. 소소한 수확이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매일 딴 고추를 가지고 내려가 배를 가르고 씨를 빼내고 햇볕에 널어 말려 김장용 고춧가루를 만드신다. 물론 초 여름에는 상당한 수확을 매일 거두셨다. 이제 끝물이라 하루 네댓 개 밖에 안 나오지만 어머니는 그것도 정성을 다해 거두고 계신다. 고추 화분에 물을 듬뿍 주고 내려왔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이렇게 정성을 다하셨을 어머니. 자식과 손자들을 다 키우고 난 지금, 구순의 나이이지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본능적 사랑과 헌신이 아직도 우리 어머니 일상 속에 진하게 살아 움직인다. 

어머니의 삶에 은퇴는 없다.

이전 04화 어머니와 함께 살기(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