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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화문에서

노인이 청춘을 만난 거리

by 다정한 세상 Mar 12. 2025

지난 주말 안국동 근처에서 선배를 만났다. 한국에 들어오면 꼭 만나고 가는 그 선배가 안국동에서 약속이 있으니 괜찮으면 거기로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윤석열의 구속이 취소되어 곧 풀려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석방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행동에 동참도 할 겸 기꺼이 그곳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안국역으로 나왔다. 안국역 출구 건너편 옛 풍문여고 자리에 공예품 전시관과 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집회에 참석하러 나온 시민들이 길을 메우고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선배는 가끔 근처에 나와서 약속 시간 사이에 틈이 있으면 이 도서관에서 숨을 돌리다 간다고 한다. 옛날 풍문여고 옆에는 유명한 냉면집이 있었다. 그 건너편에는 맛있는 빵집이 있었고. 모두 가난한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무대를 비추는 대형 스크린에서 이은미의 사랑 노래가 가슴 떨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수 이 은미는 여기 나온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사랑 노래를 부르겠다고 한다. 시위 문화가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마치 콘서트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는 진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서 함께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데 공권력이 이를 방해하거나 짓밟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된 것이라는 생각을 되씹으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이 평화로운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다시 짓밟혔을 터이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계엄의 정당성과 윤석열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누리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어떻게 얻어진 것인지 알기는 할까?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세종로를 거쳐 안국동거리를 잇는 큰길과 경복궁 동문(건춘문) 앞에서 삼청동 한옥들이 밀집한 동네를 오른쪽으로 끼고 청와대 앞에 이르는 길, 가회동 주택가를 지나 옛 경기고등학교에서 옛 풍문여고에 이르는 길은 나의 청춘이 헤매고 다니던 길들이다. 떠올리면 아련하고 고적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게 하는 그 시절이 온전히 담겨있는 동네이다. 고등학생 때 나는 건춘문 앞에서 살았다. 우리 집 가는 길에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앙** K)의 쇼윈도를 지나다니며 번쩍거리며 원색적인 저런 옷을 누가 입을까 코웃음을 치곤 했다. 나라면 절대 안 입을 것 같은 그런 옷도 꼭 필요하고 멋지게 입을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신만의 기준을 오만하게 고집했던 십 대의 나는 인정하지 못했다. 의상실 옆에는 불란서 문화관도 있어서 주말이나 좋은 영화를 상영할 때면 문화관 앞에 청춘들이 줄을 서있었다. 나중에 내가 남편이 된 남자와 곧잘 가게 되는 곳이다. 동십자각 건너편 사거리 모퉁이에 한국일보사 건물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와보니 그 대신 아주 높고 번쩍거리고 어두운 빌딩이 들어서 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건춘문 앞에서 동십자각을 건너 세종로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과 광화문 새문안 교회 앞길, 그리고 서대문 쪽 문화방송국 앞까지 이어지는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주말이면 서대문에 있는 기독교 장로회 청년회 사무실을 빌려 모였던 재경 향우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그 길을 걸었다. 그 향우회에서 훗날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다. 국민학교 동기 동창이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그 향우회에서 신입생 자기소개할 때였다. 나는 한눈에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어느 누군가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질문에는 낮 간지러울 만큼 솔직한 대답을 했다. 내 머리 뚜껑이 열리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고. 영혼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낮은 목소리를 가진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물론 이런 얘기는 결혼 후 한참이 지난 후까지도 그에게는 비밀로 했다. 1년 후 향우회는 해체되었다. 고교 입시 평준화로 더 이상 지방에서 서울로 진학할 학생이 많지 않았다. 집안이 모두 이사를 하지 않는 한. 게다가 소위 일류학교라는 것도 없어져서 향우회의 신입회원 수급로가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내가 가장 약하고 초라할 때, 비록 겉으로는 여전히 당당하고 잘난 척했지만 사실은 앞날이 보이지 않아 깜깜할 때,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뜻하지 않게 내 남편이 되었지만 그는 고교시절에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의 비밀스러운 도피처였다.

해 질 무렵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면 삼청동 길을 걸어 청와대 앞까지 가곤 했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그 길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삼청공원에서 풍기는 아카시아 향이 진동했다. 나는 나무 밑동이나 돌벽에 기대앉아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 익은 별자리들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내 생각은 삼청동 길 너머 가회동 어딘가에서 자취를 한다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 시간은 나만의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그가 꼭 내게 올 필요도 없던, 그를 꼭 만나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현실에는 없는 나만의 골방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연예인을 우상으로 삼고 행복해하는 다른 사춘기 소녀들의 심정과 똑같지 않았을까?

그 삼청동 언덕배기에 나의 또 하나의 안식처가 있었다. 국민학교 동창이었지만 실제 알게 된 것 역시 서울에 온 뒤 향우회에서 였다. 그 친구의 집이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향우회를 다녔다. 현재와 미래가 암담했던 동생들과 함께 복작거리던 작은 내 방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해 뒤척였던 다음 날이면, 혹은 재미있는 소설에 빠져 밤을 새우고 난 다음날이면 나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한옥지붕들이 빼곡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 높은 데 자리한 그 친구 집으로 가곤 했다. 친구는 오빠들과 자취를 하는 중이라 어른들이 부재중일 때가 많았고 나는 그 집에서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연애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다 잠이 들었다. 실컷 낮잠을 잔 후 어둑해진 길을 걸어 의무와 책임이 짓누르는 내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내가 언제 어떤 꼴로 찾아가든 그 친구는 마치 식구가 집에 온 것처럼 대면대면하게 받아들이고 내게 방 한쪽을 내주곤 했다. 그 집은 80년 민주화의 봄이 전국의 대학을 휩쓸 때까지 가끔씩 지쳐 찾아가는 나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였다.


세종로의 은행나무 가로수는 봄에서 여름까지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었고 가을이면 노란 단풍으로 사랑받았다. 그 멋있던 나무들이 냄새나는 은행을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잘려 나갔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광화문 새문안 교회 앞에서 무교동과 종로 1가로 이어지는 길은 나의 짧은 대학생 시절을 함께했던 공간이다. 새문안교회 대학부 일원이었던 나는 주말이면 이 동네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임을 하고 광화문 뒷골목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저녁에는 무교동 약주집을 찾아 술잔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불렀다. 물론 음치인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지만. 그때 그 친구들은 가수 뺨치게 노래들을 잘했다. 그 가슴 치게 아름답던 노래들을 다시 듣고 싶은 욕구가 가끔씩 나를 떨리게 만든다. 사회정의와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적 사회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우리가 부딪치게 될 폭력과 자기희생에 대한 슬픈 예감이,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부르는 친구의 노랫가락과 엉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빗물처럼 흐르고 스며들었다. 모두가 하나가 된 것 같은 순간들… 우리를 끈끈하게 이어준 것은 이념이라기보다 공동체적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끝자락 어느 날 무교동 동아일보사 앞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다 나는 경찰 호송차에 실렸고 호송차 안에서 무자비한 구둣발에 짓밟혔고 끝내 서대문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시위대가 아닌 척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실크 원피스를 입고 나갔는데 원피스에 찍힌 구두 발자국과 짓이겨진 껌 덩어리를 나중에 경찰서에서 발견한 나는 실없이 웃었다.


나는 반대편의 사람들(윤석열 지지자들)에게도 똑같은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해 보곤 한다. 그들도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연대하며 느끼는 공동체적 끈끈함을 가지고 있겠지. 어떤 이유에서였든 자신이 소외되고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강한 소속감과 역사의 중심에 선 듯한 자부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이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최루탄과 백골단의 발차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들 만큼 절실함을 가지고 있을까. 군대가 국회 의사당을 짓밟으려고 할 때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의사당 앞으로 달려와 맨 몸으로 군인들 앞에 막아섰던 사람들만큼 헌신할 수 있을까? 그들도 과연 신념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까?


거짓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언제까지 그 주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거짓된 주장을 끝까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짓인 줄 알면서 자신이 얻을 이득을 위해 대중을 속이는 사람들은 그 주장을 하는 것이 이득보다 손해가 되는 순간 그 주장을 버릴 것이다.

잠시동안은 그들이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이긴 것처럼 보여도 진실을 위해 자기희생을 각오한 사람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를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민주주의의 수레바퀴가 잠시 진창에 빠져 헛돌거나 뒤로 돌아 나가 우회하는 일은 있어도 그 길에서 멈춰 서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닌가.

광화문 앞 광장에서, 율곡로를 빼곡히 채운 시민들의 표정에서 나는 미래의 희망을 읽는다. 비록 윤석열의 석방 소식이 중간에 전해졌어도 그들은 더욱 결의를 다지고 더 큰 목소리로 윤석열 파면을 외친다. 지금 윤석열의 파면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사회가 겪게 될 진통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몸을 녹이러 찾아간 칼국수 집에서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으로 추위를 녹였다. 다행히 모두들 야 5당 집회에 참석하고 온 사람들이다. 먹는 동안 불필요한 긴장이 식당에 흐르지 않기를 바랐다. 4인용 테이블에 일행이 아니더라도 의자 수만큼 끼어 앉아 식사들을 했다. 우리 옆에 앉은 아저씨 한 명… 한쪽 손놀림이 온전치 못하다. 그래도 우리에게 “숙녀분들에게 물을 따라 드릴까요?” 하며 컵에 물을 따라 준다. 그가 떠난 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 한 분. 야 5당 집회 후에 있을 비상행동 집회에도 참석할 거라고 말한다. 일행과 도중에 헤어졌는지, 다시 만날 약속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서도 꿋꿋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이 더없이 따뜻해졌다. 쉽지 않은 일인데…싶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서는 부부처럼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식사를 했다.

몸을 좀 덥히고 밖으로 나오니 비상행동 쪽에서 주관하는 집회가 시작된다. 오늘이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이다. 이민 가기 전까지 매년 주최 측 단체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여성대회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연대집회를 훼방 놓고 모욕하는 주** 엄마부대의 행태를 들으면서 참으로 개탄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성대회 보고가 끝나고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연대를 호소하고 윤석열의 탄핵에 동참하는 지지 연설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한국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할 때 소위 운동권에서는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에 대한 논쟁이 제법 치열했다. 계급투쟁  혹은 반독재 투쟁에 힘을 모아야 할 때 여성문제를 들고 나오고 독자적 조직을 만드는 것은 전력을 약화시키는 분리주의적, 종파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쟁이 충분히 치열하지는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 내부에는 극복해야 할 파시즘이 많은 것 같다. 힘을 가진 자들이 더욱 많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보다 약한 사람들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빼앗는 것이 파시스트이다. 윤석열이 파시스트의 전형이다. 그는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졌지만 더 막강한 권력을 갖기 위해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의 힘을 군대를 동원해 탈취하려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파시스트적 성향이 사실은 우리 내부에도 항상 존재하고 있다. 운동권이라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그 조직의 내부에도 그것은 항상 똬리를 틀고 있다가 틈만 나면 고개를 내밀고 이빨을 드러낸다.


지금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취약성은 법과 제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미국의 상원제도는 소수의 폭정이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반 민주적 제도이다. 트럼프의 탄핵안을 막은 상원은 그 구성 자체가 구시대적 원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인구비례가 아닌 모든 주에 동일한 수의 상원의석을 배정한다는 원칙은 원래의 취지는 미연방국을 건설할 때 인구가 적은 주들이 다수인구를 가진 주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이 실행될 것을 우려해 연방 가입을 꺼리자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수에 의한 폭정Tyranny으로부터 소수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타협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이 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치려는 헌법 개정 노력은 백인 노동자 계층, 농장주, 남부 개신교 연합세력에 의해 계속 거부당한다. 법 개정을 위해 상원의원에서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전체 인구의 70%-80%가 찬성하는 법안이 애초부터 작은 주들에 유리하게 설계된 상원의석 배분 때문에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상원에 부여된 특권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고 다수의 의견을 거부하는 소수의 폭정 도구로 전락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 공저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양원제 개헌을 주장하는 자들의 시대착오적 주장은 그 동기를 의심해 봐야 한다. 세계 선진국의 대부분이 양원제를 폐지하고 국민 직접 투표와 인구비례에 맞는 단원제로 바뀌어왔다.


우리가 얻을 교훈은 국회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훼손되거나 거부당하는 일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헌법수호기관들-헌법재판소, 법원, 검찰, 경찰, 공수청, 선거관리위원회 등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그 구성을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에 맞도록 정비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의 문제와 별도로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이 나는 당황스러웠다. 극우 집회가 연일 광장에서 열리고 수만 명이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하는 광경을 한국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부지원 난입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더욱 당혹스럽다. 과거의 민주세력은 군대와 경찰력과 구사대 같은 권력의 앞잡이들을 상대하면 되는 확실한 경계를 가진 싸움을 했다. 지금은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교회에서 동원된 순진한 어린 학생들과 싸워야 하는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 앞장서서 법을 위반한 극렬한 선동가들이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은 법에 따라 처벌한다 쳐도 저 수많은 참가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자기 내면의, 우리 쪽의 파시즘에 철저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잘못 때문인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여성들의 주장, 성소수자들, 장애인들,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에 더 많은 귀를 내어주고 더 많은 자리를 내어줘야 지금 보다 더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집 값 떨어진다고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거부하는 이기주의가 내가 가진 것을 더 키우기 위해 남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 파시즘의 하나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고 내가 퇴근 후 편하기 위해 직장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온 아내에게 집안일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 지, 내 아이의 성적을 위해 다른 아이의 권리나 교사들의 권리를 묵살하고 있지는 않은 지. 교육과 직장과 일상의 가치관 전체가 강한 자들이 더 강해지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약한 사람들이 소유한 작은 것들마저 빼앗는 것을 정당화하고 격려하고 있지나 않은 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개신교회는 특히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풍선처럼 하늘에 붕 띄워 놓은 채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천당 간다는 메시지만 교인들 귀에 속삭이고 있지 않은 지 돌아봐야 한다. 성직자들은 목사의 권위를 하늘 같이 내세우며 교인들을 지배하고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도 귀찮은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 눈감고 고개 돌리며 내 마음의 평화만을 찾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3월 8일 그래도 나는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적어도 시민 사회단체의 집회에서는 과거처럼 오로지 윤석열 퇴진에 단일대오로 뭉쳐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 환경문제, 노동자 문제 등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주장이 무대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분산, 시민 구성원의 직접 참여의 확대, 다양한 이슈와 세력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 모든 법과 제도도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의식도 그 과정에서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10대 중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내 청춘의 무대였던 광화문과 안국동 거리에서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내일을 꿈꾸며 오늘, 어려운 행동에 나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노인이 되어 내 청춘의 시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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