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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01. 2024

죽지 못한 날 (5)

지독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두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를 위한 쉼터는 없으니 죽어서라도 지겨운 비극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육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할 만큼 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고통받아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지껄이며 우는 듯 웃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짓고 축 늘어져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 누구도 상처받은 아이를 도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걸쭉한 냉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그래서는 안 될 나이에, 살아가는 일에 짙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매스꺼움이 올라오며 육교 난간을 잡고 수 차례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 나는 죽어야겠다. 더는 이 짓거리를 반복할 힘도 없고, 출구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밤의 육교가 삶에서 도망치는 출구로 이어지는 다리와도 같이 느껴졌다. 차에 치여 몸이 박살 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과 인대가 터진다. 옷과 살점, 피가 한데 섞여 조각날 것이다. 피가 쏟아진 페인트처럼 바닥을 물들일 것이다. 내 죽음은 아름답지 못할 것이며, 사후에 그 누구에게도 그리어지지 못할 것이다. 무서웠다. 생의 종료가 의미하는 것. 나의 상실. 그 공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휘감아 옥죄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수많은 차들. 전조등의 불빛이 광선처럼 지나가는 도로를 내려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몸과 쿵쾅거리는 심장. 난간을 딛고 뛰어내리려는 그 순간, 마음 안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태어났다. 내 영혼의 근간이 된 목소리. 나의 본질. 쌓이고 뒤섞인 울분과 원망, 증오와 우울이 한데 합쳐진 무엇인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목소리.

.

.

.

  쓰레기 같은 인생이지. 안 그래? 하지만 나는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더 아파보렴. 더 상처 입고 더 끔찍한 날들을 견뎌봐. 추해질 정도로 버텨봐. 다리가 부러지면 팔로 기어. 팔도 부러지면 온몸을 꿈틀거리며 악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 피눈물을 삼키고 비극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웃어봐. 그런 거칠고 잔인한 방식으로라도 완성해 봐. 진짜 너를.


  그날 나는 죽지 못했다. 주저앉아 얼마를 울었었던가. 새벽이 되어 이제는 지나가는 행인조차 없는 길거리의 육교에서 목이 쉬도록 비명을 토했다. 몸뚱이는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순수하고 밝은 모습을 간직하던 내 안의 어리디 어린 모습은 자살해 버렸다. 열 배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육교에서 내려가 다시 걸었다. 온도는 너무 낮았고, 새벽 2시를 훌쩍 넘었다. 다리는 이제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배고프고 춥고 어지러웠다. 작은 상가 하나도 열려있지 않았다. 학교 옆 사거리의 큰 건물 화장실에 숨어 몸을 잠시 녹이고 다시 걸었다.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 내가 살아온 지옥.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빛에 걱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망할 애물단지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다녀왔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끔찍한 현실과 망가진 정신. 그러나 나의 영혼은 조금씩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지독하고 어두우며 비틀렸지만, 선명한 형태로.


  대단한 반전이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거지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나는 입시를 핑계로 대외활동에 매진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에게 관계란 낯설고 버거운 것이었다. 아주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미숙했기에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여전히 학교는 나에게 외로움과 우울을, 집은 나에게 분노와 충동을 선사했다. 아직 2년을 더 버텨야 했다.


  썩어 문드러진 내면을 가리기 위해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화려한 옷을 사 입고, 반지와 목걸이를 서너 개씩하고 다녔다. 센 척을 하며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녔다. 불량 학생이 되었다. 교복은 잘 입지 않았다. 그게 개성을 표현하며 내 자존감을 채우는 방법이라고 착각했다. 공부는 오래전부터 뒷전이었다.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양아치 같은 행동거지 뒤에 텅 빈 마음을 숨겼다. 입시를 핑계로 대외활동에 시간을 쏟으며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동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스턴트 인간관계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나는 엇나가고 있었고, 최악의 결말이 다가오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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