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에 있었다
나쁘지 않게 나온 성적.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을지라도, 스스로를 치하하기에는 충분한 점수와 등급이었다. 버티는 것 자체가 지옥 같았던 1년이었다. 많이 지치고 아팠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할 때조차 억지로라도 한 발짝을 더 움직이게 한 경험. 결국 내 안의 독한 놈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수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 잠에 들지 못했다. 기쁘고 후련한 마음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컸다. 1년간 외면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결과 따위 전혀 알 바가 아니었다. 성적이 조금 덜 나오더라도 나는 절대, 다시는 세 번째 수능을 응시하지 않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정신 나간 짓을 또 시도할 수는 없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기쁘게 웃을 수도 없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그 길이, 너무 많이 아팠다. 지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밤을 새워서 당시 넷플릭스에서 유행하던 <마이 네임>을 보았다.
물론 아직 논술고사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논술 시험을 그리 열심히 준비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원서를 접수한 학교 중 두 곳은 날짜를 착각하고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 딱 한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꽤 이름있는 학교의 이름있는 학과에 예비 2번 추가합격. 새벽 2시쯤이었던 것 같다. 빨간 합격 글자를 보고 복잡한 마음이었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지난 아픔들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 안의 아이가 안타까웠다.
날 떠난 어머니가 생각났다. 살아계셨다면 내 합격증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으셨으려나. 이미 어머니는 사라지셨지만 나는 내가 실패작 망나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고, 그것만으로도 한결 숨 쉬기가 편안해졌다. 내 입시의 의미는 등급이 적힌 성적표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였고 증명이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고 잠시의 달콤한 성취감을 느낄 자격이 있었다.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외면하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지독하게 강하게 버텨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연약하고 외로워 보였다. 스스로를 끌어안아 달래듯,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었다. 이미 생겨버린 흉터는 지울 수 없기에, 잠시나마 망가진 영혼을 다독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팠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날 구해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전쟁터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트라우마는 이제 내 일부이며 정체성이다. 아직도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산책하며 그때의 감정을 되새기곤 한다. 지나간 날들이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한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참는다.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밝은 사람들을 보면 참기 힘든 질투가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어머니가 그립다가도 원망스럽다. 그러나 평생 분노할 수는 없다.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발전하지 못한다. 뒤늦게나마 나는 감정을 뛰어넘어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만큼 나 자신을 미워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을 들여다보자 울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그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많이 나아졌다. 이제는 안부인사를 전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곤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 흐려지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살아가야 한다. 그 모든 순간을 끌어안고, 늘 그랬듯이 독하게 버티며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다. 마음껏 울지 못했던 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이 던지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이였다. 여전히 세상에는 아픔을 가진 아이들이 살아간다. 모두가 이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어른처럼 차려입었지만 아직 투정이 부리고 싶은 아이들이 잠시나마 해맑게 웃을 수 있기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