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아파하지 못했다
작은 창문. 그 밖으로 어두운 하늘에 흐리게 떠 있는 달을 보았다. 눈앞에 놓여있는 스물의 나이. 남은 친구는 없었다. 스스로 끊어낸 인연들도 많았다. 십 대의 마지막에, 나는 바닥에 있었다. 분노와 절망이 유일하게 남은 감정이었다.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전신을 가득 채웠다. 나는 실존의 앞에 서 있었다. 나에게는 성취와 함께 고통에 대한 의미가 필요했다. 머릿속 깊이 잠들어있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뚜렷하게 말을 걸어왔다.
결국 벼랑 끝에 섰구나. 정신 차려 강현준. 그 지옥을 버텨왔고, 이제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 해. 바뀔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시간이 왔어. 나는 더 이상 네가 그따위로 사는 모습을 방관할 수 없어.
내 본질이, 내 영혼이 나에게 성장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버텨온 지난 10년이 넘는 좁은 세상에서의 기억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감정에 휩싸였다.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껴본 투지. 나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된 전사였다.
아버지는 나를 믿지 않았지만, 내 완강한 의지에 재수를 허락해 주셨다. 나는 기숙학원에 가기로 했다.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성적을 올리기 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했다. 크게 어머니와 다투었던 그다음 날, 나는 짐을 챙겨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학원으로 떠났다.
최악의 상황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루하루를 버티기에 급급했던 아이에게 남은 건 빈약한 신체와 텅 빈 머리뿐이었다. 부들거리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중학교 교육과정을 다시 공부하며 재수가시작되었다. 태안 앞바다의 코앞에 있었던 기숙학원. 나는 물이 빠져 초록색이 되어버린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눈은 잔뜩 쌓여 발을 덮었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들어간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때, 담임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신단다. 아버님께서 데리러 오실 거야.” 어리둥절했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결말 따위.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당뇨를 앓고 계셨고, 나는 아마도 제때 사탕을 챙겨드시지 않아 저혈당 쇼크가 오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도착하셨다. 차에 타자마자 보였던 아버지의 얼굴은 낯설었다. 한 번도 그분의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과격하고 차가운 사람이었고, 나는 아버지가 분노하는 모습은 목격했을지언정 무너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담담하게 설명을 들었다. 눈물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밤중에 어머니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뇌출혈. 수술은 실패했고, 위독한 상황이었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의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수술로 인해 밀어버린 머리카락. 점액질이 덮인 불투명한 눈. 가슴팍과 팔에 연결되어 있는 생명유지장치들. 혼란스러웠다. 이상했다. 울지 못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내 정신을 억지로 틀어잡아야 했다. 삶은 내가 가장 바닥에 있을 때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몇 시간도 못 버틸 거라는 의사의 예상을 뒤집고 당신은 3일을 더 그 상태로 버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