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2020년이 찾아왔다. 중학교에 가진 않았어도 중학생이라는 나이에 접어들게 되니(교회에서 중등부로 올라가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내가 더 큰 느낌이 들었다. 꼭 어른이라도 된 양. 그렇지만 또 평범하게 그 해도 지나갈 줄 알았다. 팬데믹이 닥칠 줄이야.
교회에 못 나가기 전 일요일 날, 교회 언니와 교회에서 만나 “설마 이것 때문에 교회를 못 가겠어?”라고 했는데 결국 그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모든 일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개인 레슨, 오케스트라, 독서 모임…. 사람을 만나고 밖에서 활동하는 모든 모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 오케스트라나 바이올린, 피아노 레슨을 못 하게 된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난 그즈음에 악기를 연주하기가 싫어지기 시작했었다. 바이올린이고 피아노고 악기 연습을 해야 할 구실이 없어지자 한 반년간 악기는 켜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공부는…. 하던 대로 했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으니 달라질 것도 없었고 인강을 열심히 듣고 책을 읽고 독서록 쓰고 그냥 평상시에 하던 대로 살았던 것 같다. 달라진 점은 그런 걸 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점 빼곤 없었던 것 같다. 초졸 검정고시도 이때 봤다. 심지어 5월로 미뤄지기까지 했다. 난 2020년부터 검정고시를 마스크와 함께 보기 시작해 결국 올해까지 고졸 검정고시도 마스크와 함께 마무리했다.
비록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자주 못 보고, 같이 못 놀고, 교회에 못 가는 게 서운하고 슬프긴 했지만, 많이 불편했던 점은 없었다. 밖에 나가는 횟수가 줄었단 뿐이지 우리의 생활 양식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달까.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빔프로젝터는 주말마다 왕성하게 활동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영화를 보곤 했다. (주말에 집에서 영화 보는 일은 내가 매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젠 우리 가족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렸달까.)
원래도 항상 같이 있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더 친해진 것도 같다. 그리고 난 가족이랑만 함께하는 활동이나 여행을 더 즐기게 되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14살에는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다. 초졸 검정고시를 보고 초졸을 했다 정도? 거의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할 만한 (딱히 기억에 남는 이벤트가 없다는 뜻이다) 연도였다. 공부를 꾸준히 하고 책을 계속해서 더 열심히 읽었다. 그 시간으로 성실성과 꾸준함을 착실히 쌓아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쳇바퀴 같은 일상을 처음으로 느낀 걸로 기억하는데, 우울해지거나 괜히 지루한 하루를 보내지 않으려고 나만의 이벤트를 만들거나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 가족이 올해 한 일을 마무리하고 기억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아, 잠깐 생각해보니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도로시 L.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라는 분과 그분의 책을 만난 것이었다. 두 번째로, 작가라는 단어를 나의 직업으로 생각해보게 된 것이었다.
도로시 세이어즈라는 분은 엄마가 세계관 책을 읽으시다가 이분이 추리 소설을 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고 추천해주시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읽을 추리 소설이 없다고 한창 투덜거리던 때였다. 셜록 홈즈가 진부해지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러던 중에 또 다른 나의 인생 탐정을 만나게 된 것이다.
피터 윔지 경. 엄마의 추천을 듣고 책 줄거리를 읽어본 다음에 바로 사버렸다. 책을 단숨에 읽어버리면서 나는 윔지 경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번역된 윔지 경 시리즈는 다 읽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 시리즈가 3권밖에 번역되지 않았고 번역되지 않은 책이 꽤 많다는 사실을 접수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 책을 번역하지 않을 수 있지! 번역될 기미도 보이지 않던 터라 기다릴 수도 없었으나 난 다음 이야기를 읽는 것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무모한 선택을 했다. 그 책들을 영어로 읽겠다는 것.
야심 차게 해외 직구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나름 영어를 잘한다고 자부하던 때였다. 흠…. 그래서 그랬는지 1장(Chapter)을 읽는 데만 2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단어를 별로 외우지 않아서 한 문장, 한 문단에서도 모르는 단어가 수두룩했다) 사전을 찾아보고 그 뜻을 보고 이해하고, 문장이 길면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읽어보며 해석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런 고된 작업과 함께 읽어나가는 책이었지만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난 도로시 L.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 경 시리즈를 하나씩 독파해 나갔고 그 시리즈는 나의 서재에 한 권씩 쌓여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작 중 명작인 이 추리 소설 시리즈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이 책들을 번역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커서 꼭 이 책을 번역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듣고 있던 라틴어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공부했다. (이 책이 더 이상 번역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라틴어, 프랑스어, 가끔가다 헬라어까지 나오는데 누가 번역을 하고 싶겠는가;;)
그리고 작가라는 꿈. 원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말해왔던 목사님이 나의 직업적인 꿈이었기에 꿈이 달라지자 생각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해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난 비전과 꿈, 미래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또 직업적인 꿈과 나의 인생의 꿈을 나누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악기가 싫어지기도 했었다는 내 얘기 기억나시는가…. 다행히도 잘 극복하여 8월에는 사촌 동생과 함께 우리 가족 콘서트도 열었다. 그 콘서트는 2021년도까지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올해 우리 가족이 했던 모든 일을 잘 기억하기 위해 전시회까지 열었다. 우리 코너스톤 독서 모임(이 모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서….)에서 읽은 책, 우리가 집에서 한 활동(그림, 만들기, 글쓰기 등등등)이 전시되었었다.
난 지금까지 2020년도를 삭제된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름대로 꾸준히 살려고 노력했고, 뜻밖의 꿀 같은 휴식을 가지기도 했고, 새로운 꿈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하고, 좋아하는 일에 끈기를 가지고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때,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조용하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이 2020년도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여러 생각과 꿈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