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어른의 가장 값비싼 성장통
내 교직 생활에서 가장 눈부신 햇살 같았던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 다정함이 남긴 가장 아픈 그늘이 되었다.
처음 여학생들의 담임이 되었을 때, 남학생들과는 또 다른 결의 보람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던 아이, 효민이(가명)가 있었다. 밝은 눈웃음으로 자기소개를 하던 그 순간, 나도 따라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친구들 속에서 빠르게 중심이 되었다.
효민이는 자유롭게 학교생활을 즐겼지만, 종종 규칙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나는 그것을 질풍노도의 과정이라 여겼다. “효민아, 다른 선생님 놀라시겠다.” 웃으며 타일렀고, 아이는 “알겠어요, 쌤!” 하며 또 달려갔다. 나는 아이의 작은 반항조차 에너지라 여겼다. 다정함으로 감싸주면, 이 아이는 분명 더 좋은 방향으로 뻗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다정함은 아이에게 '만능 해결사'를 호출하는 벨이 되었다. 친구와 다툰 뒤 억울하다며 내게 달려오고, SNS 상의 문제까지 “쌤이 해결해 주세요”라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그때마다 아이의 편이 되어주었다. 학창 시절, 어른들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내 존재가 부서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자꾸만 나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지도차원에서 실시했던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진실은 서늘했다.
‘자꾸 수업에 늦는다’, ‘친구를 무시한다’, ‘자기만 생각한다.’
내가 햇살이라 믿었던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겐 그림자가 되고 있었다. 상담 자리에서 어렵게 사실을 전했을 때, 아이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흐르던 따뜻한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효민이는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놓을 수 없었다. 반 전체가 함께하는 활동을 자주 열고, 주말에도 강당에서 공동체 활동을 하는 등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려 애썼다. 효민이도 다른 아이들도 그 안에서 다시 웃었다. 하지만 가끔은 혼자 속으로 무너졌다. 연말에, 제출하지 않은 효민이의 휴대폰을 우연히 발견했다. 내가 보낸 단톡방 알림이 화면에 있었고, 화면 속 저장된 이름이 ‘담탱이 이안’이었다. 1년간 많은 정을 쏟았기에 담탱이라는 단어는 나름 충격이었다. 잠시 씁쓸했지만, 나는 겨울 방학 중에도 효민이와 친구들을 불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밥을 사주었다. 그 아이는 내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는 왜 그토록 단호하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내 어린 시절에 답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체벌은 당연했다. 잘못하면 회초리를 맞았다. 집에서도 아버지의 단호함은 늘 무서웠다. 겉모습은 크지만 속은 여린 아이였던 나는, 그 매서움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교사가 된 후, 그 상처가 아이들에게 재현될까 두려워 단호함을 애써 피했다.
그러나 효민이를 통해 절실히 배웠다. 나의 다정함이 때로는 방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는 “그건 아니야”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여러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이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단호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것은 상처를 남기는 두려움이었지만,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단단한 울타리였다. 내가 그어주지 못한 그 선명한 한계선이 아이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효민이를 떠올리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조금 더 단호했더라면, 아이가 그다음 해에 친구들과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그 아픈 기억 덕분에 나는 비로소 단단함을 배웠고, 지금의 내 교직 생활은 달라졌다.
진정한 다정함은 때로 칼날처럼 단호할 때 완성된다. 나는 여전히 다정한 교사가 되고 싶다. 다만 이제는 알고 있다. 다정함만으로는 아이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기꺼이 아픈 손가락 하나를 얻으며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