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위안을 타인에 고통에서..
한 달에 한 번 점심을 함께하는 형님이 있다. 전 직장에서 서로 의지하며 버티던 사이.
지금은 다른 길을 걷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기적으로 만나,
잘된 이야기보다 버티며 살아낸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그 시간은 짧지만 잠시나마 숨을 고르게 해주는 쉼표 같은 순간이다.
두 달 전 마지막 만남에서, 더 지쳐 있던 사람은 나였다.
본업의 월급은 50만 원이 깎였고, 투잡까지 하느라 삶이 만만치 않았다.
형님은 회사의 압박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날은 형님이 나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도하자고 약속했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같은 점심식사 공간에 앉았다.
난 마음속으로 두 달 전보다 더 깊어진 내 상황을 먼저 꺼낼 생각이었다.
이젠 월급 삭감이 아니라 3개월 무급휴가.
하지만 내 이야기는 시작도 못 했다. 형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의 둘째 아들, 초등학교 6학년.
괴롭힘을 당하다가 방어하려 뿌리친 손발이 상대 아이 얼굴에 닿았고,
안경이 깨지고 상처가 남았다.
처음 폭력의 발단은 상대 아이였지만, 그 부모는 합의 없이 교육청 학폭위까지 끌고 갔다고 했다.
게다가 아들은 이미 언어폭력과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상대 부모는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 합의가 되지 않으면 형님은 맞고소를 결심했다고 한다.
원하지 않았던 싸움이 순식간에 형님 가정의 일상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얹혔다. 내년에 중3이 되는 딸이 바라던 국악고 진학을 준비 중이다.
특수한 예체능 학원의 월 100만 원 비용, 먼 거리 픽업과 등하교.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은 형님에게 이 모든 부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있는 회사의 집요한 압박까지. 말 그대로 사방에서 터지는 일들이었다.
나는 그 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는 단 한 줄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듣고, 공감하고, 또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통도 깊지만, 지금 형님이 겪는 고통은 훨씬 복잡하고 무거웠다.
살아간다는 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각자 완전히 다른 전장을 통과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고통의 크기도 모양도 서로 다르다.
난 오늘 문득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이 생겼다.
행복에 대한 부러움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타인의 고통이 잠깐이라도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도덕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쉽지 않은 감정이다.
내가 사악한 사람이라서일까? 아니면 인간이 원래 이런 존재일까?
아마 누구에게나 이런 마음의 그늘은 있다.
죽을 만큼 힘든 줄 알았는데 누군가 더 큰 무게를 짊어진 모습을 보면
“그래, 나도 다시 버텨보자” 하고 마음을 추스르게 되는 것.
하지만 그 비교에서 힘을 얻는 건 오래가지 못한다.
그건 온전한 위로가 아니라 잠깐의 착시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안도하는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흔들림이다. 정답은 결국 하나다.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나만의 기준’으로 이겨내는 삶.
그것이 더 단단한 삶이고, 예수님이 바라시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은 마음이 많이 흔들린 하루였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위로의 근거로 삼지 않고,
내가 서야 할 자리에서 버티고 걸어가는 힘.
오늘 이후 나는 그 마음의 체력을 키우는 데 더욱 집중하려 한다.
고통의 정도를 비교하는 대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을 기도와 성찰로 견디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