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잡생각
가슴이 따뜻해 지는 뭔가가 필요하다.
가끔 우주에 관한 과학 정보를 접할 때면, 새삼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애초에 지구가, 태양이, 우주가 그러한데,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산다면,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것인가 의문이 든다. 똑 같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고 해도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를 순 있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워낙 지속적인고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이 있다 보니, 어렸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인간적인 욕망이야 꿈틀대는 것을 어찌할 순 없지만, 그래도 결국 다 사라지고 말 신기루 같은 것들에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아가야 하는 건지에 대한 회의감이랄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신앙인으로서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최종적인 삶의 태도를 관철 짓고 결정지을 수 있다는 입장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결국 사라지고 말 것들에 왜 그리 수고를 감내하는가 하는 물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결국 그 애쓰는 대상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한 순간이 영원이고, 그 순간에 행한 모든 것들이 귀한 것이 되기에, 유일회적인 삶은 더없이 값진 것일 수밖에 없다. 주변의 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눈 기억은 영원하다. 시공간을 넘는 사실, 참된 진실로 영속한다. 그러나 그 귀한 삶을 사라지게 될 명성과 부, 권력을 쫓는데에만 사용한다면?
그것들이 역시 엄연한 삶의 부분이고 어쩌면 인류사에 필요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명암을 따지기 이전에, 삶의 대부분이 그 성취하기 어려운 대상들을 위해 소모된다는 사실은 불편하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그게 참 어렵다.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항상 유혹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고, 생존이 보장이 되어야 다음 단계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다른 단계를 그릴 수 있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고 싶다. 노동은 고귀한 것이지만,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노동의 결과물을 자신의 성과로 받아들이기 힘든 구조이다. 모든 것이 분절화되어 인간 역시 부속화 된 자리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는 것이 쉽겠는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돈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리를 감내하게 되는 노동 현장은,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을 꿈꾸고, 세상에는 ‘경제적 자유’라는 이상한 용어가 나돌게 된 것 같다.
회사 점심시간에 뭔 잡소리를 이렇게 늘어놓는가 싶은데 회의감이 들었다.
애정을 쏟는 일도,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충족감도 부족한 상황 같다. 애써 그러한 일들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삶은 무료하고 별의미 없는 것들로 지나가 버릴 거 같아 아쉽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애쓰는 일이 나에게는 우스운 일 같으면서도 나 역시 그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먹고사는 일로부터 해방이 같은 의미 아닌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합리화라면 그 말도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닌 걸까?
자유롭게 된 다음 단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바람에서 나온 갈망의 표현일 뿐일까?
무슨 일이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묵묵히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몫은 분명 있을 것이다.
직무와 직업이 개인에게 주는 자긍심과 만족감이 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전자의 수준에서 그치다 보니, 과연 그것만으로 족한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문제가, 생업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