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철철 눈물도 철철이면 어디부터 막아야 되나요?
낯설고 어색하지만, 어쨌든 우리 동네/ 치과
은근 치과는 과잉진료나 오진이 많은 편인 것 같다.
내가 혼자 사는 독립 청년이었던 시절,
한 곳에서 진료를 받고 믿을 수 없는 가격에 다른 치과에 가보았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한 군데 더 가보고 나서야 치료를 받은 기억이 있었다.
어느 치과에서 내 사랑니를 보더니 이건 뺄 수 없는 거라고 말해 주었고,
그다음 치과에서도 뺄 수는 있지만 큰 병원에 가서 빼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나의 누워 있는 사랑니는 뺄 수 없는 거구나 생각을 하며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다.
옆으로 누워 있던 그 사랑니는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 진통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 금이 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출산의 진통을 겪으면 자연스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건 줄 알았건만 나는 진통이 걸리자 숨도 못 쉬게 아팠다. 숨도 못 쉬는데 소리를 지를 여력도 없어서 그저 두 손으로는 침대보가 뜯겨 나가라 꽉 쥐고 어금니를 꽉 물고 진통주기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조용한 산모였다.
출산 후 밥을 먹을 때마다 이가 시렸다.
산후풍이 온 줄 알고 꽁꽁 싸매며 며칠을 참고 참다가 집 앞 치과에 가보니 금이 가있고,
뽑긴 뽑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못 뽑겠다는 병원만 둘이었다.
큰 병원을 가서 아주 길고 긴 대기시간을 기다려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에 이사를 했고, 새로운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
믿을 만한 치과를 하나쯤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았다.
첫째 아이의 친구들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일 때 빈구멍이 숭숭 나있는 걸 보니,
당장 내일이라도 우리 아이도 유치가 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실로 꽁꽁 묶어 탕탕 잘도 뽑아내셨던 것 같은데
왠지 그걸 내가 해야 하는 입장에 서자니 슬그머니 겁이 났다.
내가 잘못 손댔다가 이 뿌리라도 잘 안 뽑히면 어쩌나, 피가 철철 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피도 철철 눈물도 철철이면 일단 피부터 막아야 하는 거지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미리 아는 치과를 알아두자 싶었다.
그전에 다니던 어린이 치과는 우리 집에서 차를 타고도 30분은 가야 했다.
아이의 이가 20개인데 앞니를 제외한다 쳐도 12번을 그 먼 길을 오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이들의 구강검진을 핑계 삼아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치과에 들렀다.
첫째 아이는 씩씩하고 용감하게 문제없이 구강검진을 마쳤지만 둘째는 달랐다.
아예 치과 의자에 앉지조차 못하고 내 멱살을 꽉 잡으며 울었다.
나는 진땀이 났고 결국 아이를 내 배 위에 올려서 같이 치과의자에 누워서 구강검진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아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느낌의 치과였다. 여기는 패스.
스케일링을 받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걸 깨닫고는 , 다음 검진 때 가보아야지 점찍어둔 치과에 나 혼자 스케일링을 받으러 가보았다. 나름 맘카페와 네이버에도 꼼꼼히 검색해 보고 후기를 읽어보고 골라둔 곳이었다.
진료 대기를 걸고, 치과를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한편에 책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책장이 내 스타일이었다.
내가 지금껏 본 대부분 병원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책장에는 대부분 '이런 책은 왜 사서 꽂아두셨지' 싶은 몇십 년 된 백과사전이나 날짜가 한참 지난 잡지, 삼국지나 병법서 같은 것들이 주로 꽂혀 있었다.
하지만 이 치과에는 내가 요즘 읽었던 책들이 꽂혀있었다.
가장 위칸과 가장 아랫칸에는 의학서적들이 꽂혀있었고, 내 눈길에 닿는 곳에는 천선란, 김초엽, 김호연, 한보름 작가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베르나르의 책과 영화에 관한 책들도 몇 권 꽂혀 있었다. 그 아래는 만화책 미생이 꽂혀있었고, 아이들이 읽는 WHY 책 전집이 꽂혀 있었다. 책 컨디션도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책장을 보고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있는데, 7~8살쯤 되는 아이가 엄마아빠의 토닥임을 받으며 치과 안으로 들어섰다.
언뜻 들으니 뭘 먹다가 이가 빠졌고, 처음 이가 빠지는 것 같았다.
곧 나에게 닥칠 미래를 눈으로 볼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간호사는 친절하게 무슨 종이를 꺼내어 아이 엄마에게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고,
아이는 소파에 앉아 몸을 반쯤 아빠무릎에 기대어 엎드려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스케일링을 받으면서도 그 아이가 내내 궁금했다.
간호사와 의사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 치과는 아이에게 호의적인 편인 것 같았다.
사실 어찌하다 보니 의사 선생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으며 대화하고 진료를 받고 나왔지만,
왠지 친절한 훈남이 상상되었다.
돌아오는 길, 일단 내일 당장 아이의 아랫니가 빠지면 책을 좋아하는 친절한 이 치과를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번 방문에 그 치과의 책장에는 어떤 책이 새로 꽂혀 있을지 궁금 해졌다.
단골 치과는 어떻게 정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