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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당아욱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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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May 28. 2023

기다릴게

"네가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줘"

고등학교 2학년초의 일입니다. 그야말로 뒤늦은 사춘기를 보내느라 밤을 지새우며 시험공부를 등한 시 한 결과 참담한 성적을 받았었습니다. 31등! 56명 이과반에서 31등이라! 두 눈을 의심한다는 표현이 딱입니다. 나름 1학년 때는 반 1등, 전교 12등 정도의 성과를 내보았던 나였으니까요. 김마리아가 나온 역사 100여 년의 이 명문여고에서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성적표를 들고 어쩔까 머뭇거리던 때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눈치가 빠르신 어머니께서 "왜?"라고 물으시고 나는 반 접은 성적표를 만지작 거리다 " 안 보여드리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었습니다.

" 잘 못 봤어?"

"형편없어요."

그 짧은 대화 끝에 어머니께서

" 너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줘. 기다릴게. 기다리는 나야 쉽지, 공부하는 네가 힘들지."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나를 믿고 내 공부를 수고한다! 일러주신 어머니 말씀에 힘을 내고 다짐을 하며 공부에 얼마나 빠져들었었는지. 새벽 3시, 세면대에 얼음을 넣고 얼굴을 담가 잠을 쫓았습니다. 서서 가는 버스에서 창문에 식을 그려 넣는 상상을 하거나, 새벽 1시까지 라디오를 들었으나 한 곡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공부에 몰입했었던 경험을.

오로지 해부학을 공부해서 인체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정으로 선택했던 이과는 제게 쥐약이었습니다. 수학에는 선천적 결함이 있는 것만 같이 지금도 일상에서의 계산조차 느린데 이과라니요! 수학성적이 중요한 이과에서 성적이 잘 나오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일기장을 주고받는 등 10대의 감정소모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미뤘던 나.


늘 잊지 못합니다.

엄마의 그 한마디!


"기다릴게, 너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줘"


그때부터 기말고사까지 '수학정석' 시험범위를 7번 훑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엔 천장에도 흰벽에도 문제가 떠오르던걸요. 점심도시락을 5분 만에 해치우고 도서관으로 달려 40분을 확보했던 열의, 한 시간 반의  버스시간이 아까워 만원 버스에서 암기를 위한 쪽지를 꼬깃하도록 쥐고 있던 경험!

결국 다음 기말고사에서는 놀라운 성적을 거둬 마이크를 잡아야 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무대에 오른 기억은 생생합니다. 전교성적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중에 의대를 간 친구들 사이 반에서는 한 손안에 들었으니 31등의 불명예를 깨끗이 씻어버린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 년 후 역시 이과는 잘 안 맞아서 문과전향을 한 후 지리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전과를 자축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인문지리 관련 책들을 사랑합니다.



얼마 전 브런치 작가 승인이 났을 때 엄마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 어이구 장하다"며 다시 한번 그 이야기가 나온 가족모임에서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면담을 갔더니, 얘가 글 쓰는 재주가 있다시더라구" 하시며 덧붙이시는 우리 엄마.

" 맞다. 엄마! 그러고 보니 교지에 내 글이 실린 적 있지. 100주년 기념이었나? 백발의 선배들이 식에 죽 늘어서고 막 그랬는데."

장단을 맞춰봅니다.


이 경험을 소재로 남에게는 기다려주는 것의 놀라운 효과를 누누이 강조했지만 사실 내 안에서의 일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를 믿어주는 일 그리고 기다려주는 부모의 지혜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힘들기에 해내는 것의 결과가 더 대단할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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