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가사 전역을 하게 되다
국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른 병원처럼 환자복을 입지는 않고 몇 가지 검사 후 생활복을 입었다.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휴식을 취하면 될 거 같았다. 아침과 저녁에 점호를 하는데 이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만 있으면 숫자를 세고 특이사항만 물어보고 끝이 난다.
하루 종일 아침, 점심, 저녁을 주고 그 외에는 자유시간이었다. 그래서 핸드폰만 하였다. 원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보았다. 피엑스도 가고 싶으면 가고 아주 편했다. 그리고 수술 주위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낫는데 병원 간호사분께서 엄청 친절하게 정기적으로 치료를 해주셨다. 군 병원은 불친절하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밥 먹고 드라마를 보고 씻고 자고 생활을 약 1주일 정도를 했다. 언제쯤 사회로 나갈 수 있는지 생각을 할 때쯤 우리를 불렀다. 곧 나간다는 말을 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는데 다쳤기 때문에 국가유공자를 신청을 하였다. 예전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되었지만 요즘은 흔한 상황이기 때문에 안 될 확률이 높다고 하였다.
곧 나간다는 마음에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짐들을 들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내가 집까지 어떻게 갈지 말이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설 날 전에 내보냈기 때문에 버스표가 없었다. 어느 글에서 군인인 것을 어필하면 버스 바닥에라도 앉혀서 가준다고 한 것을 보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절박하게 말하지 않아서 그런가.
여러 루트를 찾다가 드디어 한 자리가 남았다. 큰 가방을 들고 목발을 짚으며 한 걸음씩 가는 내가 초라해 보였지만 마음은 편했다.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안 들어가도 되는구나. 사회 공기가 좋다고 느꼈다. 집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행복은 역시 멀리 있지 않았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재활치료도 스스로 꾸준히 했다. 전역은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기다리면 알아서 된다고 하였다. 아직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월급은 계속 들어왔다. 그걸로 용돈을 받지 않고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팠던 수술은 처음이었기에 이제 축구를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