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은 참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버거운 한 해였다. 전년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득표율이 신민당이 민주공화당을 앞섰다.
가경 선생은 이미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강원도 횡성군 지금은 강림면이지만 안흥면 소속 시절에도 1800 유권자 중 김대중 표가 50표 나왔을 때 50인 중 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민주공화당 김용호 선거운동비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받은 것을 강림 1리부터 5리까지 윌현리 부곡리까지 다니면서 막걸리 사주고 고무신 돌리고 소 한 마리 값은 챙겼다.
다음 주는 신민당 박영록 사무실서 아버지와 가경 선생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어르신만 믿겠다고 하고 역시 소 서너 마리 값을 주고 갔다. 아버지와 가경 선생은 구역을 나누어 이번에는 박영록이 주는 술값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술을 샀다. 노인들은 도대체 누굴 찍으라는 거냐 물으면 술맛 좋은 쪽으로 고무신 문수 잘 맞는 후보 찍으면 된다고 하셨다.
선거에 져 선명야당 주장하는 김영삼을 제명하자 영삼이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더 신이 나서 외신기자와 회견을 했다.
김영삼 제명에 열받은 부산시민들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자 진압하는 경찰에게 연탄재를 뿌렸다. 학생들이 상가로 도망가면 상인들은 셔터를 내려 학생들을 보호했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무역학과 정광민 학생이 유인물을 만들고 뿌려 시작된 데모는 학생들이 시작했지만 침묵을 지키던 부산시민들이 가세하여 박정희가 가장 겁나는 민란으로 번졌다.
참고로 정광민이 초안을 쓴 부마항쟁의 선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언문>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간생략)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부조리...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금융...
특수 권력층과 결탁하여...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 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했던 사실...(중간 생략)
터무니없이 낮은 성계비 미달의 저임금을 지불하고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국민의 후생을 증대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심한 소득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 보라.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 선량한 지식인 내지 모든 우국지사에게는 유사시 총이며 칼인 것이다.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불터우세. 혼탁한 시대를 사는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위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폐정 개혁안>
1. 유신헌법 철폐
2. 공평한 소득 분배
3. 학원사찰 중지
4. 학도호국단 폐지
5. 언론 집회 결사의 완전한 자유 보장
6. YH 같은 악덕업주 엄단
7. 전 국민에 대한 정치 보복 중지
정광민은 이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후 취직도 안되어 고달픈 인생을 살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박정희는 무시했다.
박정희는 유신헌정은 거듭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선택 정립된 것이며 지난 7년 동안의 국민적 실천과 체험을 통하여 그 효율성과 정당성이 여실히 입증된 바 있다고 발언하면서 우리는 계속 유신헌정을 굳건히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내외로부터 어떠한 도전과 시련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펼쳐나가자고 역설했다. 박정희는담화문에서 부산에서 데모 이슈가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것을 일체 언급이 없었다. 무시한 것인지 4.19 직전의 이승만처럼 눈감고 귀를 막아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에서의 데모를 직접 확인하고 보고하려고 박흥주를 대동하고 부신역 근처에서 숨어 데모를 관찰했다.
데모하는 학생이 200명이라면 시민들이 800명 네 배나 많았다. 차지철이가 경호실 조직을 풀어 부산에 껌팔이 소매치기 때밀이 구두닦이 등 하층민 양아치들이 김영삼 추종자들의 부추김으로 부산에서 데모를 했다는 보고가 새빨간 거짓말임을 박흥주와 김재규 네 눈과 스무 개의 발가락이 확인했다.
서울로 복귀한 김재규가 심각하게 보고했다. 부산의 데모는 학생만의 데모도 아니고 양아치들의 데모도 아닙니다. 평범한 부산시민들이 학생들 데모에 가세한 민란입니다.
특단의 조치 없이는 넘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보고에 와이셔츠 단추구멍만 한 박정희 눈이 일그러졌다.박정희는 버럭 화를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했다.
옆에 배석한 차지철이 각하 탱크로 밀어버리면 해결됩니다. 이 차지철이 탱크부대 출신 아닙니까 걱정 마세요 하는 소리에 일그러진 얼굴이 해맑아졌다.
그래 임자처럼 밀어붙여야지 중정이 너무 물러터져 탈이야 했다.
이래저래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김재규는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하는 것을 거사일로 정했다.
문세광이가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을 때 그래도 경호실장 박종규는 단상 앞으로 뛰어나가기나 했지 차지철 이놈은 경호실장이라는 게 총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가고 18년 통치자의 최후를 지킨 것은 가수 심 양과 모델 신 양이었다.
전 세계에도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최후를 여자 둘 사이에 죽음을 맞이한 것도 기네스 북에 오를만하다고 가경 선생은 통탄했다. 박선호가 진술하려는 것을 김재규가 막아서 진술 안 했어도 가경 선생은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매년 달력에 화보로 나오는 미인 대열에 드는 여자 특히 매주회사 달력의 여자들은 다 박정희가 안가에서 데리고 놀은 여자라고 하시며 장손은 절대 회보에 나오는 여자는 중매가 들어와도 거절하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