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백수 문학관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문의전화: 054) 436-6834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서른한 번째, 백수 문학관이다.
백수문학관은 경북 김천에 위치해 있고, 김천시에서 건립.운영하는 문학관이다. '백수(白水)'는 시조시인 정완영의 호로, '깨끗한[흰] 물', '오염되지 않은 물'이 되어 세상을 정화하고자 했던 정완영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는 '호'라고 한다.
백수 정완영 시인은
현대시조의 선구자로 중흥기를 열었던 한국 시조계의 거봉
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정완영 시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작품도 생소했다. 대표작으로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 '모과', '을숙도', '조국', '해바라기처럼' 등이 있다고 한다. 교과서에도 오래 실리고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 '조국'이다. 하지만 시인은 스스로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라며, '을숙도', '모과',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를 꼽았다.
을숙도는 소설가 요산 김정한(문학관 탐방기 https://brunch.co.kr/@dccf2b522a5a488/10)의 '모래톱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하다. 낙동강 하구,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모래섬 을숙도(乙淑島)는 한자 그대로 새가 많고, 물이 맑은 섬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철새가 많고 갈대가 무성한 곳이다.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 있데.
그래서 목로주점엔 대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낙일(落日)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 정완영, <을숙도>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를 보며 '인생'을 떠올렸을테다. 인생도, 칠백리의 낙동강도 오랜 길을 걸어 지쳐 누웠고 '해'도 마지막을 향해 떨어지고, '술잔'에 갈매기 울음소리도 와서 '떨어진다'. 긴 강만이 우리의 인생을 닮은 건 아니다. 백발이 가득한 사공의 말마따나, '하루 해'도 우리 '인생'이라 하루하루 매번 막막히 저물고 있다.
이 시의 서정성이 너무 깊고 아득해서, 문학관에서 처음 이 작품을 읽고 입구에서 챙긴 소책자를 몇번을 뒤적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박재삼 시인(문학관 탐방기: https://brunch.co.kr/@dccf2b522a5a488/7)도 떠올랐고, 시인 김용택도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의 문학세계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정완영 시인은 박재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리지만 굉장히 좋아하고 조석으로 만났던 시인은 박재삼이야.
그 사람만이 한국의 시인이야, 그 사람이 한국말의 연금사라.
박재삼을 두고 '그 사람만이 한국의 시인'이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문학관 입구로 들어가면, 넓은 로비가 시원하다. 입구 오른쪽으로 전시실이 있고, 정면에는 사무실, 왼쪽에는 세미나실이 있다. 그리고 안 쪽으로 집필실이 있다. 로비 오른쪽의 전시실로 가면 제일 먼저 작가의 '흉상'과 '시인의 연보'를 볼 수 있다. 연보에는 연혁과 함께 그 아래에 해당 시대의 주요 작품들과 수상경력 등이 함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흉상 옆에는 그의 대표작 '조국'이 함께 놓여 있었다.
정완영 시인은 1919년에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1948년 작품 '조국'을 창작하였고, 1960년 '해바라기'가 국세신보 신춘문예 당선되었고, 1962년 그의 대표작 '조국'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후 한국문인협회, 시조시인협회 등에서 활동을 했고, 만해시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육사문학상, 육당문학상을 받았고, 1995년에는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국', '분이네 살구나무', '부자상' 등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대표 시집들과 생전의 사진들이 있고, 한쪽으로는 서각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들을 하나씩 감상할 수 있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 문득 떠오른 작품이 하나 있었다. 동시조로 분류되는 '분이네 살구나무'다. 김용택의 시는 서사적이라면 정완용의 시는 압축적이다. 김용택의 서정이 성숙하다면 정완용의 서정은 순수하다. 깊은 여백 속에서 현대 시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내용이 길어 글의 마지막에 덧붙여 놓습니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 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 정완영, <분이네 살구나무>
그는 자신의 시작에 대해 '시를 쓰던 날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마다에 등불을 달아준다는 심정으로 향 사르고 정좌하고 지성을 다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무소유를 통한 정갈한 마음과 삶을 잃지 않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작품을 고향에 있는 '직지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시를 쓰는 마음이 이토록 깊으니 그의 작품에 담긴 시어 하나하나가 깊고 따뜻하다.
문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 일기, 친필 원고 그리고 그의 서재와 훈장, 유품 등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시인들의 문학관의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대표작을 전시해 두어, 현장에서 직접 읽어 볼 수 있다는 점인데 백수 문학관도 마찬가지로, 그의 대표 시조들이 그래픽 패널로 세워져 있다.
시 뒤로 그래픽 패널의 배경이 있어 좀 더 감각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반사된 빛들로 인해 시를 읽기에는 아주 약간 불편했다. 하지만 9편 정도의 대표작을 모두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중 역시 그의 대표작 '조국'이 특히 눈에 띄었고, 인상적이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 정완영, <조국>
'가얏고'. 우리 전통악기인 가야금을 조국에 빗대어 쓴 현대 시조이다. 전통적 정서가 잘 녹아 있다. 가야금[조국]을 켜는 '떨리는' 열 손가락, 그것은 서러운 내 조국에 대한 '마디마디 애인 사랑'이다. 가야금이 둥기둥 울면 우리의 서러운 민족이 흰 옷자락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가얏고[조국] 열두 줄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았는데, 조국은 말 없이 학처럼만 야위어 간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광복의 날은 돌아왔건만 사람마다의 가슴에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여순 사건이 일어나고, 대구 10.1사건이 일어나고, 6.25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암울한 생각을 울며 읊조렸던 것이 후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나의 작품 '조국'이다."
전통적 정서와 가락, 감각적인 시어와 섬세한 감정, 전통적 시조의 바탕 위에 현대 자유시의 요소들이 곳곳에 녹아 있는 멋진 작품이다. 시조에 대한 시대적 거리감 없이 현대 서정시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백수 문학관은 설립 취지에서도 언급되었듯 '민족의 정서와 삶의 가락이 베어 있는 문학관'이다. 또 한 분의 위대한 작가를 만났다. 시조에서 박재삼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좋았다. 정완영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
한 줄 느낌
- 시조 시인이 아닌 현대 서정 시인의 문학관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 줄 평
- 민족의 정서와 삶의 가락이 베어 있는 문학관
*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집
어느날인가
그 어느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김용택, <그 여자네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