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033. 김동명 문학관

by 바이크 타는 집사

<김동명 문학관>

- https://visitgangneung.net/pub/ruins.do?mode=v&seq=90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화요일, 신정, 설날, 추석
문의전화: 033) 640-4270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서른세 번째 김동명 문학관이다.


IMG_8295.jpeg


시인 김동명은 시 '파초''내 마음은'으로 유명하다.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내 마음은'인데, 표현법을 배울 때 항상 나왔던 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 같다. 은유법의 예시로 많은 참고서에서 등장한다.


은유법: 'A는 B이다'와 같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대치해 표현하는 방식.
예시) 내 마음은 호수요.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간은 금이다.


여기에 나온 '내 마음은 호수요.'가 바로 초허 김동명의 시 '내 마음은'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 부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오.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리라.

- 김동명, <내 마음은>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곳에 이 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 시는 '내 마음은'이라는 추상적인 원관념을 다양한 구체적인 보조관념으로 치환하는 기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명 문학관은 김동명의 생가터에 건립되었다. 문학관 왼쪽으로 시인의 생가가 있다.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다.

IMG_8296.jpeg


김동명은 1900년에 강릉에서 가난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고 한다. 자식 교육에 관심이 깊었던지, 신식교육을 받기 위해 원산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는 1923년 개벽지'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면'이라는 시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바다, 호수, 하늘, 구름, 바람, 화초 같은 자연을 사랑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물질이나 명예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물을 바라보며 시를 쓰고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절필하였고, 절필했던 시기에 칩거하지 않고 '동광학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매진했다고 한다.



문학관 입구에 그의 대표 시 '내 마음'이 걸려있고, 1930년 출간된 첫 시집 '나의 거문고'가 전시되어 있다. 2017년에 시집 '나의 거문고'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6년 여 년간의 연구를 통해 원형을 복원했다고 한다.

IMG_8306.jpeg
IMG_8308.jpeg
IMG_8307.jpeg
IMG_8311.jpeg


2013년 개관한 문학관은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잘 관리되어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중간중간에는 최근에 손을 본 듯 꽤 세련된 느낌으로 벽면의 전시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관람하기 좋았다.

IMG_8313.jpeg
IMG_8314.jpeg


김동명 시인의 삶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정치인 김동명', '정치논객 김동명', '아버지 김동명', '교육자 김동명', '사람 김동명'으로 나누어 그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주변인들의 회고를 인용하는 등 김동명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IMG_8322.jpeg
IMG_8318.jpeg


또 그의 문학 세계와 특징이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고 감명받아 즉석에서 쓴 헌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며 등단했는데 이 시와 함께 '나의 거문도' 역시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1930년대 이후 대표시인 '파초''내 마음은' 같은 시들이 나오는데 이때가 작가로서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제된 언어와 형식, 적절한 이미지와 비유 등으로 자연을 노래하면서 그 속에 조국애와 종교적 성찰이 녹아 있는데, 그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시기이다.


전시실 제일 안쪽 중앙에 김동명 시인의 집필실이 있고 그 양쪽으로 그의 시기별 대표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집필실에는 그가 실제로 소장했던 책들과 함께 그의 친필 원고와 유품인 회중시계가 있다. 동선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시인의 일대기와 시세계가 보이고 이어서 초기 대표시 전시, 집필실, 중기 대표시 전시, 후기 대표시 전시로 이어진다.

IMG_8323.jpeg
IMG_8331.jpeg
IMG_8336.jpeg
IMG_8326.jpeg


김동명은 늘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1968년 타계할 무렵 김동명은 수입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가난함이 몸에 배어 청빈하게 살았지만 늘 글을 썼다고 하며, 그가 남긴 유품은 친필원고와 아내가 선물한 회중시계가 전부였다고 한다. 전시실의 유리에 최근에 새긴 듯한 글귀들이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집필실 유리에 새겨진 글귀가 있었다.

IMG_8327.jpeg
IMG_8330.jpeg
1968년 1월 타계할 무렵 김동명은 직업도, 원고료 수입도 없는 빈손이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난 그의 삶엔 늘 '가난'이 따라다녔기에 청빈함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붓과 원고지만큼은 쉬이 내려놓지 않으려 했다.
타계 6일 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던 김동명이 남긴 유일한 유품은 친필원고와 아내가 선물한 회중시계뿐이다.
김동명의 시 <술 노래>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갈매기 같이 날으고'라는 구절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에 찬 부르짖음과 동시에 세월의 덧없음을 내포하고 있다.
가난했기에 오히려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간 시인에게는 시간 역시 물질만큼 덧없는 것이었으리라.
비록 그의 회중시계는 멈췄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의 시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IMG_8337.jpeg
IMG_8338.jpeg


전시실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많은 유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였고, 늘 청빈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문학관도 그러했다. 특히 그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1930년부터 해방 전까지 그는 전원에 살면서 자연물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 단순한 목가적 전원시는 아니었다. 민족적 비애와 역사적 고뇌가 녹아 있는 전원시였다. 그의 대표작인 '파초'는 그런 그의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리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김동명, <파초>

파초는 잎이 넓고 길게 자라는 열대 식물이다. 바나나가 파초속의 식물이라고 하는데, 바나나 잎처럼 자라는 관상용 식물이다. 먼 남쪽에 고향을 두고, 남의 땅에 살고 있는 '파초'는 잃어버린 조국이다.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하는 화자는 파초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성스레 물을 주고 추워지면 방에 들여 가꾼다. 그리고 함께 '겨울'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고등학교 때 문학선생님이 '파초'를 설명해 주셨는데,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시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은 대충 이러했다.


열대 식물인데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 와서 자라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겨울에 특히 관리를 잘해 줘야 하는 식물인데, 나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화자가 파초를 보면서 "아차~!" 했을 거라고. "너도 힘들겠구나."라고. 그리고 파초를 가꾸며 함께 망국의 아픔을 이겨내자고


그리고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으니, 선생님은 파초를 직접 묘사해 주셨는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바나나 나무는 아무도 본 적이 없으니 바나나 나무에 빗대어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열심히 묘사해 주셨는데, 당시 나는 길고 단단한 종려나무를 떠올렸던 것 같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야 파초가 종려나무가 아니라 바나나 나무 같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수업을 들으면서도 '드리운 치맛자락'을 종려나무 잎을 꺾어 거꾸로 뒤집으면 길고 촘촘한 주름치마처럼 내려 퍼지니까 비유가 적절하다고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대학졸업할 때까지도 파초가 종려 나무라고 알고 있었다.



전시실에서 나오면 세미나실이 있고, 문학관 오른편 얕은 언덕으로 시비가 세워져 있다.

IMG_8343.jpeg
IMG_8342.jpeg
IMG_8345.jpeg
IMG_8347.jpeg

조용하고 아담한 문학관이었다. 처음 김동명 문학관 했을 때, 누군지 떠오르질 않았다. 시 '파초'와 '내 마음은'을 보고 나서야, '아~ 시인 김동명!' 하고 뒤늦게 무릎을 쳤다. 그의 삶도 범상치 않았다. 역사적으로 또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던 작가이다. 물론 아내가, 김동명의 부인이 사망하고 바로 다음 해 참의원에 당선되고 곧 재혼을 했다는 연표를 보고는 쳇~하고 돌아서긴 했지만 말이다.


바이크가 좋고 문학이 좋아 시작한 일이지만, 이 더운 여름 이게 뭐 하는 건지 갸웃거리며 다녔다. 김동명 시인도 만나기 위해 강릉의 좋다는 관광지는 다 마다했다. 그리고 향한 다음 행선지는 '한국시집박물관'과 '만해마을'이다.




무더운 여름, 강릉의 좋다는 유명한 곳은 다 지나쳐서 문학관을 다녔다. 아내가 같이 다니면서 관광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여러 차례 지나더니, 좋고 유명해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다 패스하고 아무도 안 가는 문학관에만 간다며 농담 삼아 투덜거렸다. 나도 전남과 경북 지역을 다니면서 이미 현타가 오고 있었다. 더 먼 곳인 강원도까지 올라오니,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바이크로 전국을 다니는 것은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자동차 보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런데 시간과 체력을 쏟아 그 유명한 '경포대', '오죽헌', '임당동성당', '커피박물관' 등을 다 포기하고 문학관에 갔다. 그 먼 곳까지, 게다가 중간에 1박까지 해가며 강릉에 왔는데, 오죽헌이나 커피 박물관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싶어 더욱 그랬다. 아직은 모르겠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


올 한 해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바이크를 탈 수 있을까 하고 세운 계획이니, 어떻게든 해 나가 봐야겠다. 그냥 바이크를 탈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문학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으니 된 거 아닌가.






한 줄 느낌

- 김동명 시인이 '파초'와 '내 마음은'으로만 설명되는 시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줄 평

- 작고 아담하지만 모든 걸 채워 놓은 문학관

keyword
이전 04화소설문학의 시원지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