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만해문학박물관
관람시간: 09:00~17: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문의전화: 033) 462-2303
#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한국시집박물관, 만해마을 라이딩 영상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서른다섯 번째, 만해문학박물관이다.
만해는 누구나 존경하는 민족의 대표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홍성에 '생가터'와 '만해문학체험관' 있다. 그리고 강원도 인제에는 '만해 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만해 마을 안에 '만해문학박물관'이 있다.
만해마을은 '님의 침묵'을 집필한 백담사를 뒤에 두고 2003년 조성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건립하여 운영하다 2013년 동국대학교에 기부하여 현재는 동국대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지도의 '문인의 집'과 '설악관'은 숙소인데 앞에 흐르는 북천의 물소리가 너무 좋았고, 설악산의 울창한 숲 속에서 조용히 쉬어갈 수 있는 곳 같았다. 내설악의 자연 속에서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면서 만해의 정신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만해마을'이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들어가면 입구 왼쪽으로 숙소가 있고, 맡은 편에는 북카페가 있다. 그리고 만해사 법당과 만해 흉상이 님의 침묵 광장과 마주 보고 있다. 광장을 지나면 바로 '만해문학박물관'과 평화의 종이 있다.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님의 침묵광장 뒤쪽으로는 바베큐장도 있었는데 사용료가 있다고 한다.
앞서 '시집박물관'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는 바람에 만해문학박물관으로 곧장 갔다. '최우수 문학관' 선정됨을 알리는 표지가 있는 문학관의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복도가 나온다.
복도 양쪽에는 우리나라의 '보물'을 소재로 쓴 시들이 '징' 위에 새겨져 걸려있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 다시 중정 같은 큰 로비가 있다. 로비에는 '풍상세월(風霜歲月) 유수인생(流水人生)'이 붙어 있는데 만해 선생이 직접 쓴 글씨다. 바람과 서리가 몰아치는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인생은 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다. 전시관 안에 친필 서예가 액자로 걸려 있었다. 그리고 로비의 친필 글씨 아래에는 만해 선생의 일대기가 있다. 그 유명한 북향집인 '심우장'도 소개되어 있다.
일대기에 나와 있듯, 만해 선생은 1933년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는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되어,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해 집을 지었고,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심우장의 '심우'는 불교 설화로 '소를 찾는 길'을 말하는데,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이야기로 풀어낸 '십우도'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
읽을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타 하면 찾은 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잃을 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라면 무엇을 찾아야 하며,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면 찾는다 한들 다시 잃게 되니 아예 잃어버린 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냥 애초부터 없던 것이니 찾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도 아닌 게 되는 건지... 지독한 역설이다. 어쨌든, 심우장은 '나를 찾자'는 의미라고 한다.
만해문학박물관 1층은 상설전시실, 2층은 기획전시실이 있는데 1층만 보고 나와버렸다. 덥기도 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했는지, 2층 안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쉽다. 하지만 찾지 않으면 잃은 것이 아니라니 ㅎㅎㅎ 2층을 못 봤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않으면 애초에 2층은 없는? 어쨌든 아쉽다.
전시실은 중간 가벽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만해 선생의 초상화부터 시작해서 '불교인', '문학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만해
<올곧은 항일지사>
기미운동이 폭발될 때에 온 장안은 대한독립만세로 요란하고 인심을 물끓듯 할 때에
우리는 지금의 태화관 당시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다 경찰부에 포위되어
<중략>
열두서넛 되어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자동차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두 손을 들어 또 부르다가 일경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부르다가 마침내는 잡히게 되는데,
한 학생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옆의 학생은 그래도 또 부르는 것을 차창으로 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그때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에 인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 조선일보, <평생 못 잊을 상처>에서
문: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문: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글과 정신을 접할 때마다 친일을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러 서적들이 눈에 띈다. 특히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대표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을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의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이미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읽을 때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징적 시어들에 감탄을 하게 되는 작품이다. 학교 다닐 때 경어체의 여성적 어조라고 배웠던 기억도 난다. 그의 시가 대체로 경어체의 여성적 어조를 띄는데, 다른 시들과 달리 유독 이 시에서 나는 여성적 어조 속에 숨은 '강인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처절하면서도 확고한 의지, '정신 승리'의 의지가 느껴진다.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방어기제로서의 정신승리가 아니다.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흔들림 없는 정신의 굳건함이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굳건한 정신으로 '님'을 지켜나겠다는 다짐이다. 또 이뿐만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가장 높은 꼭대기)에 들어부'었다는 표현을 통해 이별의 슬픔을 새 희망으로 치환하고 있는데, 나는 늘 이 하나의 문장이 상당히 절묘하고 인상적이다. 무거운 슬픔이 담긴 커다란 수레박을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 올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데 역시 강한 의지가 녹아 있다. 그로 인해 뒤에 이어지는 유명한 시구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가 상당히 힘을 얻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일보와 한용운의 관계도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던 주요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노천명이 소개되어 있었다. 한용운을 기념하는 박물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싶다. 노천명은 친일 이력으로 비판을 받는 시인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사슴으로 유명한 노천명이지만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194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 찬양, 전쟁 선동하는 글을 섰고, 당시 친일문인단체였던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활동을 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기자로도 일했다고 하며, 전쟁 선동의 주요 실무자 격이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문학관 탐방하는 동안은 친일작가들에 대해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친일은 친일대로 비판하되, 문학에 대해 더 알아간다는 의미에서 친일을 하지 않은 작품들의 가치들도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만해의 박물관에 노천명의 이름과 시인으로서의 행적이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통탄할 일이다.
1929년 '조선일보' 투고한 '조선청년에게'라는 글도 울림이 크다. 현대의 조선청년을 불운아라고들 한다는데, 만해 선생은 당대의 조선청년은 시대적 행운아라 한다. 역설적이지만 역경의 시대이기에, 역경을 깨치고 새로운 낙원을 청년들의 손으로 건설할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할 일 없는 태평한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할 일이 있는 시대에 태어났기에 많은 일을 제 손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향복(복을 누리는 것)은 과거인의 피와 땀의 대가인데, 후대에게 향복의 유산을 주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게 되는 조선청년은 행운아라고 말한다. 나라를 잃은 젊은 청년들이 이 글을 읽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을 테고, 그것이 시대를 어떻게 바꾸어가고, 또 조금 더 먼 미래 후대에 무엇으로 남을지를 생각해 보면 피가 끓어올랐을 것이다. 고개가 숙여지는 큰 울림의 글이다.
만해 선생의 친필 서예 붓글씨가 전시되어 있고 아래에는 우리말로 풀이되어 있다. 서예 액자 맨 위에 앞서 로비에 있던 '풍상세월 유수인생'도 보인다. 흉상화 훈장도 전시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을 기념하는 곳은 내가 파악한 바로는 세 곳이 있다. 강원도 인제의 '만해문학박물관(2003년 개관)', 경기도 광주의 '만해기념관(1998년 개관)', 충남 홍성의 '만해문학체험관(2007년 개관)'이다. 어떻게 같고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라이딩 시즌이 왔다. 조만간 충남의 만해문학체험관에 갈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만해기념관을 가게 될 것 같다. 기대된다.
한 줄 느낌
-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의 철학과 정신세계를 통해 역사와 문학과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 줄 평
- 만해의 문학적 행적과 함께 발간된 시집, 친필 서예, 훈장 등 박물관적 요소가 특히 눈에 띄는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