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우리가 대화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오전 고작 삼사십분뿐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발바닥이 땅에 닿은 후 그 순간부터 시간의 반을 화장실에 가서 앉아있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들에게 좋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가는 말이 곱지 않으니 당연히 아들의 반응도 곱지 않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찬기류 담은 시선과 표정, 불친절한 몸짓, 감탄사, 한숨으로 사소한 싸움이 시작된다.
우리 집은 비슷한 시간대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세명이다.
한 명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오래 앉아있으면 나머지 둘은 그가 나올 때까지 씻기를 기다리던지 아니면 그 시간을 버릴 수밖에 없다. 아들이 용변을 누고, 뒤늦게 씻느라 화장실에서 나오는 시간이 늦어지면 나머지 두 명이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니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반복되는 이야기는 잔소리가 되는데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가서 핸드폰을 보느라 용변 처리가 늦다고 생각했다.
‘이놈의 유튜브. 아작을 내던지 해야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해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가족 식사 시간에 ‘아침에 사용하는 화장실’에 대한 주제로 토의를 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의 말투가 따뜻하지 않다. 건들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이야기해서 굳이 꺼내서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적해서 고쳐야 한다. 같이 살려면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남편의 중재로 결론은 났다. 누가 먼저 기상을 하든 화장실, 샤워를 이용하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했고, 그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중간에 나와서 다음 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정했다.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들은 처음 태어났다는 특권의식 때문인지,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건지 둘째, 셋째가 화장실 이용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이용해서 등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정해진 규칙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나고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낳은 자식인데, 바르게 가르쳐서 사회에 나가게 해야 한다는 사명의식도 생겼다.
이럴수록 서로의 거리는 생기는 느낌이지만,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엄마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