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숙취가 심했다. 한 모금씩 홀짝일 때는 몰랐지만 한 병을 비우니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다. 속은 멀쩡한데 머리만 아프다. 간밤에 꾼 꿈 때문일지도 몰랐다.
날 책망하던 언니의 눈빛, 냉정한 목소리, 서로의 안위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날들이 꿈에서 영화처럼 지나갔다. 여섯 시간 만에 반년의 이야기를 압축시킨 공포 영화 같았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지나친 편집으로 개연성이 없다며 욕했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감독이자 작가였다. 모든 장면이 끔찍할 만큼 생생했고 타당했고 괴로웠다.
꺼놨던 휴대전화를 다시 켰다. 언니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언니와 대화할수록 나는 오답투성이 문제지였다. 문제는 많으나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정답이 무엇인지 가늠도 안 되는 바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저 낭창한 엘로와 함께 있다.
엘로는 이미 밭으로 나갔다. 비가 많이 온 뒤에는 줄기 군데군데 억센 덩굴손이 자란다며 미리 방지해야 한다고 했다. 오전 내내 소파에 누워 창밖으로 손톱만 한 엘로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해가 저물 때쯤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는데, 문밖으로 큰 소리가 났다. 빠르고 강하게 구르는 발소리, 현관을 세차게 닫는 소리.
조심스럽게 살피니 얼굴을 구긴 엘로가 허둥대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사냥꾼이라도 따라오는지 풀숲을 헤치는 사슴처럼 온 집안을 잰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날 보더니 환히 웃었다.
나는, 없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엘로가 말했다. 없다니? 무슨 말이지?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화장실로 들어온 엘로는 날 밀어내고는 문을 닫았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 집문을 두드렸다. 낡은 나무문을 부술듯한 소리가 났다. 탕. 탕. 탕. 거칠게 누군가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뿌리가 검은 금발, 정수리에 선글라스를 끼워둔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날 보고는 잠깐 당황하다 이내 무어라 말했다.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들은 건 남자, 알다, 여기 정도가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지으며 없다고 답했다.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집 안쪽을 살폈다. 다행히 걸쇠를 풀지 않아 들어오진 못했다. 또 높고 빠른 말을 늘어놓는 여자에게 미안, 몰라, 없어 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전했지만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동 응답기가 된 나는 진이 빠져 한국어도 대응했다.
없어요.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여자가 말을 멈췄다. 나를 빤히 바라보다 ‘코리아?’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더니 돌아갔다. 작게 무슨 말을 읊조린 것 같았으나 역시 알아듣지는 못했다. 아마 욕이 아닐까 싶었다.
여자가 돌아가자마자 엘로는 화장실에서 나와 창문마다 커튼을 쳤다. 해가 저물고 난 뒤라 커튼을 친다고 해서 집이 어두워진 건 아니었지만 엘로가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이 어두워졌다. 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엘로의 과거를 묻지 않고 지냈다. 이런 곳에 혼자 지내는 이유, 나를 절대 밭 뒤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 가족이나 친구는 없는지 심지어 나이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엘로에게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엘로도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작은 것 하나까지 물어가며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방과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창문으로 밖을 살피던 엘로는 진정이 되었는지 내게 돌아왔다. 가볍게 날 안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달콤한 목소리에 왼쪽 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엘로는 항상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서로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간혹 대화가 애매하게 끝난다면 서로의 손등을 쓰다듬었고, 거기까지였다. 손등을 덮고 쓸어내리는 것, 그건 우리에게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는 문장의 마침표 같은 거였다.
엘로는 온몸이 축축했다. 얇은 면티가 착 가라앉아 몸태가 그대로 보였다. 천천히 등을 토닥였더니 엘로는 물러났다. 미안해. 괜찮아. 우리는 손등을 쓰다듬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그 여자를 다시 생각했다. 누구였을까. 엘로는 왜 숨었고 여자는 왜 화가 났을까. 치정이나 원한일까. 근데 여자는 한 번도 엘로를 말한 적이 없다. 좁은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한 빈약한 상상력은 여기가 한계였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으로만 나 좋을 대로 짐작했다. 벽 너머 은은하게 들리던 샤워 소리가 멎었다. 엘로는 반바지 차림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대학교 정원 분수대에 저렇게 생긴 동상이 서 있었던 것 같다. 엘로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잘자, 하고 인사했다.
파비? 파비오? 그게 누구야?
나도 모르게 엘로에게 물었다. 저절로 움직인 입에 놀랐고 엘로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파비오. 여자에게서 알아들은 말은 남자, 알다, 여기 말고도 몇 개 더 있었다. 파비오라는 이름과 내 정체를 따지는 질문. 엘로는 답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무엇을 물어도 늘 확실한 답과 행동을 보여준 엘로가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았고 내 눈을 피했다.
그 여자는 누구야?
이번에도 엘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아는 사람. 눈이 데구르르 굴러가며 겨우 말했지만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는 묻지 않았고 엘로는 다시 인사했다. 잘자.
잘 자지 못했다. 궁금한 게 생기니 잠이 오질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밭으로 나서는 엘로에게 일손을 보태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거절했다. 전에도 몇 번이나 함께 일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 통을 닦거나 창고에 짐을 옮기는 일은 허락하면서도 밭에 들이는 건 꺼렸다.
어제 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엘로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긍정 혹은 부정의 정확한 답, 지체 없는 행동과 의사 표시. 그 모습이 어제의 엘로를 더욱 미심쩍게 만들었다.
평소처럼 엘로를 배웅하고 몰래 집을 나섰다. 난생처음 다른 사람의 뒤를 밟았다. 미행이라고 해야 할까. 목적 없는 미행의 끝에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따라나섰다. 엘로의 발걸음에 맞추며 그림자처럼 밭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엘로는 넝쿨을 돌보지 않고 곧장 뒤편으로 향했다.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밭의 뒤편. 엘로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옆에 기댄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잔뜩 찡그린 얼굴과 조급하고 망설임 없는 삽질을 보며 나까지 불안해졌다. 한참을 파헤쳐 엘로가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잘만 웅크린다면 두 명쯤은 거뜬히 들어갈 크기의 구덩이다. 엘로는 삽을 내려두고 구덩이 안에서 검은 비닐로 꽁꽁 감싼 무언가를 끌어 올렸다.
무겁고, 크고, 수상한 보따리였다. 허겁지겁 풀어 헤친 비닐 속에 무엇이 있는지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숨을 죽이고는 천천히 엘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젖은 흙을 밟는 소리 따위는 엘로의 거친 손길을 버티지 못하고 반쯤 찢어발겨지고 있는 비닐 소리에 숨었다. 마침내 검은 봉지 속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건 돈이었다.
지폐 다발이 수두룩했다. 한 달이지만 엘로가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본 바로는, 평범하게 벌어놓은 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저축한 돈인가. 하지만 누가 돈을 땅속에 저축하나. 은행과 금고라는 안전한 장소를 두고 마치 들키면 안 되는 돈인 것처럼…….
엘로는 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엘로가 나에 대해 많은 걸 묻지 않은 이유는 자신에게 숨겨야만 하는 큰 비밀이 있기 때문이었나. 그동안 마음에 쌓아둔 엘로의 이미지가 헝클어지고 있었다. 반짝거리고 눈부시고 따뜻한 엘로. 드러내진 않아도 숨기는 건 없는 정식하고 성실한 엘로. 그건 모두 내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몰랐다.
어림잡아도 스무 개는 넘어 보이는 비닐을 모두 열어 확인한 엘로는 다시 다발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구덩이 안에 던져 흙으로 덮고, 발로 꾹꾹 눌러 윗면을 다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시야에서 구덩이와 엘로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 뒤를 돌아 집으로 달려갔다.
집문을 닫자마자 창밖을 살폈다. 밭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엘로가 보였다. 넝쿨 사이 사이를 살피며 농사아비로 돌아갔다. 내가 뒤를 따라다녔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소파에 앉아 숨을 크게 한번 몰아 내쉬었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는 엘로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타국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낯선 남자와 함께 지낸 것도 황당한데 이제는 그 남자가 수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도망갈 궁리는 떠오르지 않는다. 언니가 지금 날 봤으면 분명 얼빠진 년이라며 욕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엘로를 좋아하나. 그래서 떠나지 못하나. 아니었다. 일단은 엘로를 알아야겠다.
밭과 함께 엘로가 나의 출입을 막은 곳, 침실로 향했다. 내부는 단출했다. 작은 옷장에는 티셔츠와 바지 몇 개가 고이 접혀있고 별다른 수납장은 없었다.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킹사이즈 침대와 작은 옷장이 전부인 방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 걸까. 이불과 베개 밑을 확인해 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생활 공간에서 이렇게 개인 물품을 발견할 수 없다니. 마지막으로 길게 늘어진 이불보를 걷어 올려 침대 아래를 확인했다.
성의 없이 뭉친 신문지 덩어리가 보였다. 밖으로 꺼내 신문지를 벗겨냈더니 또 돈다발이다. 구덩이에 있던 것보단 적은 양이었지만 평범하게 모은 돈으로 보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 돈을 셌다. 지난 가을 사기꾼이 가져간 내 돈만큼의 액수를 셌는데 바닥에는 아직 그보다 많은 돈이 깔려있다.
아, 내가 바로 떠나지 못한 이유는 돈인가. 엘로를 좋아한 게 아니라 돈이었나. 이 돈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 언니와 화해할 수도 있겠고 이곳에서의 기억은 작은 일탈 정도로 추억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깨끗하지 못한 돈이라 숨겨놓았을 텐데 조금 없어졌다고 엘로가 날 신고할 수 있을까. 애초에 없어진 걸 알아차리기나 할까. 나는 또 멋대로 상상했다.
엘로가 곧 돌아올 것 같아 우선 돈을 돌려놓았다. 돈다발을 뒤로하고 책을 읽었다. 의미 없이 활자만 훑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내용 없는 독서는 눈에 띄게 빨랐다. 이걸 독서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300여 쪽의 소설을 세 시간 사이 두 번이나 훑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주인공 이야기였는데, 드문드문 눈에 들어와 결말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담배처럼 글을 읽을 뿐이다.
태양이 지고 어둠과 함께 엘로가 왔다. 손에는 삽 하나와 비닐 자루가 들려있다. 아침에 본 그 비닐이다. 구덩이 위를 흙으로 덮고 발로 밟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했는데, 저 비닐이 왜 저 손에 있나. 혹시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긴 걸까?
유. 괜찮아?
눈앞까지 다가온 엘로가 괜찮냐고 물었다. 늘씬한 손가락이 내 미간을 가리킨다. 긴장했던 얼굴 근육을 풀고 여느 때와 같이 싱긋 웃었다. 엘로는 소파 옆 구석에 삽과 비닐을 내려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나는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문 여닫는 소리가 나지 않게 책을 괴어놓고, 집 주변을 살폈다. 색이 다른 땅도 없고 수상한 상자나 보관함도 없다. 30분이 지나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시야를 점점 좁게 만들었다. 당장 돈을 가지고 나갈 생각은 없으면서 돈의 위치는 알고 싶었다.
20분이 지났을까, 아무리 살펴도 평소와 똑같은 풀과 돌멩이만 보일 뿐이다. 하는 수 없이 우선 들어가기로 했다. 아래 괴어놓은 책을 집어 천천히 문을 닫으려는 순간. 틈 사이로 손 하나가 쑥 들어와 강제로 문을 열었다.
악!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비명을 인사 삼아 침입한 사람은 어제 찾아왔던 그 여자였다. 뿌리가 검은 금발, 정수리에 꽂은 선글라스가 그대로였다. 눈치 좋게 화장실에선 물소리를 멈췄다.
나가요! 난 한국어로 단호히 말했다. 이 한마디로 나가주면 좋으련만, 여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열린 문을 향해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바닥에 뒤꿈치를 끌며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명품 운동화를 신고 명품 시계를 찬 남자는 불행한 얼굴로 여자 옆에 섰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외계인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