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떠나자.”
내 돈이 어느 사기꾼의 통장으로 들어간 그날. 시들어 있는 내게 물을 주듯 진우가 말했다. 언니가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나의 말에 이은 대답이었다. 가족이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전하는 동안 내 눈은 죽어있었다고, 진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언니가 죽지 않아 슬픈가. 맞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다를 뿐이었다.
아침에 언니와 나눈 대화, 경찰서에 다녀온 것, 이제 나에게는 이 작은 집의 월세 보증금만 남았다는 것까지 진우에게 토해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진짜 무서운 건 언니의 차가운 눈빛이라는 것도.
진우는 다시 말했다. 멀리 떠나자고. 지금 당장 다시 일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생활하는 건 무리라고 했다.
“경찰에 신고도 다 해놨다며. 어차피 조사 끝날 때까지 한 달은 걸려. 그동안만이라도 쉬자. 멀리 떠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질 거야.”
조금 고민하다 제안을 받아들였다. 머리는 터지기 직전이었고 심란한 마음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잠깐 쉬고, 다시 살아야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진우는 나를 감싸안았다. 연신 고맙다며 내 등을 다독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수시로 내 기분을 살피고 안부를 묻는 진우에게 최대한 밝은 답을 하려 노력했고 때로는 실제로 기분이 나아졌다.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면 귀신처럼 도시락을 종류대로 사 오는 진우 덕분이었다. 우리는 더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여행 준비도 모두 진우가 담당했다. 월세 보증금을 유럽행 티켓과 맞바꾸며 수중에 한푼도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휴직 대신 퇴사를 권한 직장, 진우에게서 오는 연락을 제외하면 종일 한 번도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 내가 벗어놓은 옷가지만 봐도 한숨을 쉬는 언니. 오직 진우만이 날 숨 쉬게 했다.
보증금의 절반으로는 유럽 왕복 티켓을, 절반으로는 경비로 쓸 심산이었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겠지만 당분간은 진우와 함께 지내기로 했으니 괜찮았다. 진우는 먼저 떠났다.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지인과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가봐야 한다고 했다.
“사흘이나 나 혼자 어떡해. 그동안 나 혼자 뭘 하지.”
“시간 금방 가. 도착 시간에 맞춰서 공항에서 기다릴게. 걱정 마.”
어쩐지 떠나는 진우의 뒷모습이 홀가분해 보여 서운했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 사흘 후에 다시 만나면 된다. 힘들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했다. 진우가 사놓은 작고 귀여운 디저트들은 항우울제에 버금가는 효과를 나타냈다.
이틀 뒤,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날이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긋지긋한 한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경찰서로 와 달라는 전화 한 통이 그간의 여행 계획을 모두 꿈인 것처럼 느낄 만큼 무서웠다. 나, 경찰서에 다녀올게. 데려다줄까? 아니야 괜찮아. 상상의 진우를 뒤로하고 홀로 경찰서로 향했다.
“우선, 그날 중국 번호로 전화가 왔다고 하셨죠? 근데, 발신지가 한국이었습니다. 보통 외국에서 한국 번호로 연락하는데 반대였어요. 정확한 장소 특정은 아직이지만 영등포 부근입니다. 범죄 형태가 특이해서 찾아보니까 2년 전에도 같은 내용으로 신고된 게 있더군요. 이게 용의자 사진인데, 혹시 본 적 없으십니까?”
서글서글한 눈웃음, 낮은 코에 까무잡잡한 피부, 왼쪽 볼 아래 점. 모를 수가 없었다. 지겹도록 봐온 진우였다.
“이전 피해자는 그렇게 크지 않은 금액이었어요. 삼백만 원 정도. 범인을 특정했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대요. 근데 사기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아도 처벌하게 되어 있어서……”
경찰관의 말이 오래된 테이프처럼 드문드문 느리게 들렸다. 이전 피해자는 친히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고 피해 금액이 많지 않은 점과 피해자와의 합의가 주요 감경 사유로 적용되어 기소유예를 받았다고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허둥대며 진우에게 연락했다. 전화도 메시지도 받질 않았다.
“사흘 전에 출국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금액대도 크고 초범도 아니니 협조 요청 넣어보겠습니다. 다만, 확답을 드리긴 어려워요. 우선 기다려주세요.”
“그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제 친구…”
친구가 맞는가? 진우와 나는 친구인가? 연인이었나? 모르겠다. 뒤늦게 경찰서로 달려온 언니가 나를 데리고 나왔다. 궁금했던 게 생각났다.
“근데 언니. 그때 있잖아. 내가 사기당한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진우가 연락해 줬어. 아무래도 네가 사기당한 것 같다고….”
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텅 빈 통장 잔액이 우스웠다. 여행 경비로 쓸 예정이었던 돈은 모두 진우에게 송금했고 이제 남은 건, 나에게 남은 건 뭐지?
끝까지 모멸감을 주고 사라졌던 진우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진우도 당황했는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목에 쇠기둥이 들어찬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금발의 여자는 나와 진우를 번갈아 보고는 그대로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른 엘로가 곧장 침실로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여자는 눈 깜짝할 새 뛰어 들어가 엘로와 마주했다. 소란스러운 안쪽 사정과 달리 나와 진우는 침착했다. 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우를 눈앞에 두고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이다 물었다.
너야? 정말 너야?
멱살을 잡고 욕지거리가 먼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내가 뱉은 건 고작 이런 말이었다.
응. 나야. 어차피 다 알았을 거 아냐.
진우는 거침없이 답했다. 정말 너였구나. 그랬구나. 미친 새끼, 하고 되뇌었다. 속에서 시꺼먼 불길이 일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설마 나 찾겠다고 이 먼 나라까지 온 건 아니지? 줬던 티켓도 가짜였는데.
너 없으면 내가 죽어버릴 줄 알았어?
누가 그렇대?
진우는 피곤한 듯 코를 매만지다 엘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엘로, 하고 답하자 진우가 웃었다. 순간 저대로 입을 찢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엘로? 지가 엘로래? 아니야. 저건 파비오야. 갱단의 돈을 훔쳐 달아난 파비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제 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이 사람은 나를 이용하고 배신한 저열한 쓰레기다. 그렇지만 엘로가 사실 파비오라는 말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밤 파비오가 누군지 물었을 때 묘하게 반응했던 엘로가 떠올랐다. 여전히 순진하고 멍청해. 진우가 중얼거렸다. 내가 순진하고 멍청했기 때문에 모든 걸 잃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가슴 속 검은 불길이 더 크고 세게 일었다.
나를 보고 한숨 쉬던 진우가 오크통 위에 걸터앉았다. 내일 씻어두려고 문밖에 세워둔 통이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가짜네.
가짜?
싸구려 럼에 포도즙만 적당히 섞으면 와인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
엘로와 손등을 쓰다듬으며 먹던 와인이다. 라벨만 붙인다고 와인이 되는지. 진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지금껏 가짜 농부와 가짜 와인을 마시며 안식을 얻었다. 시내에서 잘못 탄 버스, 아무 정류장에서 내려 잘못 든 길이 이끈 포도밭, 그 포도밭에서 만난 엘로. 모든 걸 포기하고 차라리 더위에 지쳐 잘못되길 빌던 찰나에 만난 엘로. 그 엘로가 가짜라는 말인가.
고개를 돌려 침실을 바라봤다. 엘로가 침대 위에서 돈을 끌어안은 채 구타당하고 있다. 아니, 돈 위에 엘로의 몸이 놓였고 본능적으로 웅크린 몸 틈으로 돈이 끼어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엘로의 안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여자의 주먹질은 매서웠고 자비는 개나 줘버렸다. 옆구리와 등허리,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하는 주먹은 온통 피범벅이다.
그럼 너는, 너는 뭐야?
나는 저 여자의 친구 같은 거. 몇몇 사람에게는 사기꾼이었고 오늘은 통역사.
진우는 당당했다.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저 여자의 부탁으로 통역을 하러 왔을 뿐이라며 말을 끝냈다. 여전히 무참하게 맞고 있는 엘로와 그런 엘로를 처연하게 바라보는 진우.
나는 떨리는 몸으로 진우를 부여잡고 부탁했다.
저 사람 좀 말려줘. 돈을 찾아야 하는 거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내가 왜? 저대로 죽여도 난 상관없는데. 저 여자 심기는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너도 살고 싶으면 여자가 때려도 반항하지 마. 나중에 조직에서 단체로 찾아오는 수가 있어.
제발. 친구라며.
진우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우물쭈물 걸음을 옮겼다. 도둑처럼 조용히 다가간 진우가 여자의 어깨를 건드리자마자 여자의 주먹은 진우에게 날아들었다. 단 한 대로 진우의 턱은 찢어졌다. 중지에 낀 반지가 칼날이 된듯했다.
저 여자애가 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대.
진우는 날 가리키며 말했고 여자는 그제야 침실에서 나왔다.
엘로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엘로? 아.
여자는 비웃으며 내 손목을 잡아챘고 피투성이가 된 엘로 앞에 앉혔다. 미안해 미안해. 엘로는, 파비오는 형체가 완전히 무너진 얼굴로 피를 뚝뚝 흘리며 부어터진 입으로 말했다.
엘로. 그 돈, 훔친 거 맞아?
일부는 내 돈이었어. 6개월만 같이 살아주면 다섯 배를 준다고 해서 바보같이 믿었을 뿐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여자는 엘로가, 파비오가 하는 말을 듣고도 아무 부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들썩이고는 이제 돈을 내놓으라며 날 일으켰다. 헛웃음이 났다. 이 모든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와 엘로가 앞장섰고 진우와 여자가 뒤에서 따라왔다.
밭의 뒤편,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삽을 든 엘로는 아침과 같이 몸을 움직이고자 했으나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다. 한참을 맞았으니 당연했다. 나는 엘로에게서 삽을 빼앗아 들고 직접 땅을 팠다. 지켜봤던 것보다 훨씬 깊었고 힘들었다.
이윽고 검은 봉지가 삽에 닿았다. 여자는 날 밀어내고 직접 확인했다. 찢어진 봉지 사이로 흙이 들어가 더러워지긴 했지만 규모는 변함이 없었다. 여자는 진우에게 마당에 있던 차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나와 엘로는 구덩이 밖으로 돈을 꺼내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내려놓은 삽을 주워 들고, 엘로가, 파비오가, 여자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콱, 콱, 콱. 몇 번이나 온 힘을 다해. 마침내 여자의 머리가 으깨지고 나서야 파비오는 삽을 멈췄다. 지독한 몸짓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죽었을 거야. 미안해.
파비오가 내 손등을 쓰다듬으려 다가왔다. 나는 손을 뒤로 숨기며 뒤로 물러섰다. 지겹다. 끔찍하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곧이어 차를 끌고 진우가 나타났다. 구덩이에 밀어 넣은 여자를 보지 못했는지 차에서 내려 여자를 찾았다. 밤이었고, 가로등 없이 어두웠고, 파비오는 또 삽을 들었다. 진우는 여자보다 덜 참혹했다. 그래도 머리의 형체는 유지했으니.
나와 파비오는 시체 두 구를 묻고 돈을 차에 실었다. 나까지 묻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파비오는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오늘 일이 평생 악몽처럼 따라다닐 거라며 계속해서 혼잣말했다. 그리곤 잠시 쉬었다 해가 뜨면 떠나자고 했다. 지금처럼 어두울 때 차를 모는 건 헤드라이트 때문에 눈에 더 띈다며 물어보지도 않은 이유를 댔다. 궁금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약을 챙겨 먹은 파비오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금세 잠들었다. 밭에는 사람이 둘이나 묻혀있다. 내 앞에서는 살인자가 잠들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나를 두고 까무룩 잠들었다. 나는 대체….
이 집에 들어올 때 내가 챙겨온 유일한 것. 작은 캐리어 하나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차에 실어둔 돈을 캐리어로 옮겨 담았다. 반의 반도 담지 못했지만 캐리어 하나를 딱 채우고 손을 멈췄다. 남은 돈은 모두 집안으로 들였다. 향초에 불을 붙이던 성냥을 찾아 지폐 하나를 들고 불을 붙였다. 활활 잘도 탄다. 집안 곳곳에 불을 놓고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서며 문에 불을 놓았다.
세 걸음 앞에 작은 나무 푯말이 보인다. 비냐vigna, 하고 적혀있다. 푯말을 뽑아 문에 기대어 불을 옮겼다. 불은 온통 나무인 집을 삽시간에 삼켰다.
흙길 위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는 처음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
여기, 포도밭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