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가련한 얼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홀렸을까.
잠든 엘로를 보며 유치한 생각을 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 달이다. 한 달째 저 얼굴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난 먼 타국까지 날아온 목적을 외면했다. 엘로와 함께한 한 달 남짓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평안했다. 어쩌면 길을 잃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게, 내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분명 시내 중심에서 탄 버스가 돌고 돌아 표지판도 없는 들판에 멈췄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알아듣지도 못하는 기사의 설명을 듣고 버스에서 내린 상태였다. 어디선가 시원하고 달달한 냄새가 났고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는 열기와 뒤섞여 녹진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끈적한 바람을 헤치며 몇 시간을 걸었다.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 말고는 사람도 건물도 없었다. 걷고 있던 흙길의 너비로 보아 차가 다니는 길인 듯 했지만 몇 시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혼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풀 냄새와 흙 냄새, 시큼하고 달콤한 과일 냄새가 뒤섞여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토록 오래 걸었던 건 처음이었는데도 힘들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단 하나의 길을 따라갔고 해가 넘어갈 즈음 엘로를 처음 만났다.
그날도 엘로는 땀을 흘리며 포도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짧고 굵은 가위로 톡, 가볍게 가지를 잘라내는 손놀림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엘로에게 다가갔고 그와 가까워질수록 진한 포도향이 풍겼다. 향수는 다 거짓말이라고 만드는 냄새였다. 엘로는 잠시 당황하다 날 포도밭 바깥으로 인도했다. 온통 땀범벅인 날 보고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난 처음 본 남자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무어라 건넨 말 중 알아들은 건 ‘물’이라는 단어 하나였다. 고개를 끄덕였고, 엘로가 가져다준 물을 마셨다.
갈증이 해소되자 엘로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내가 그를 살피는 것처럼, 그도 날 살폈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길고 진한 눈매로. 어느 조각가의 역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엘로의 시선이 닿았던 곳마다 열이 올랐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실소했다. 한심했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낯선 이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는 일이라니. 눈을 꼭 감았다. 엘로를 쳐다보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으나 스쳐 지나간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건 내 의지로 막을 수 없었다. 그를 보고 싶었다. 눈에 계속 담고 싶었다.
서툰 발음으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물컵을 건넸다. 엘로는 컵을 받아들고 또 무어라 말했다. 이번엔 아무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고개만 갸웃대자 그는 도로를 가리키고는 손으로 가위표를 지어보였다. 길이 없다는 말인가. 엘로의 손동작을 따라 가위표를 만들고 ‘no?’라고 물으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노을이 묻어 반짝거렸다.
해는 순식간에 졌고 어둠이 모든 걸 가렸다. 길도, 포도도, 하늘도 모두 검었다. 가로등 없는 길을 되돌아가자니 그제야 발이 아팠다. 하루만 신세를 지겠노라 엘로에게 부탁했다. 엘로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집으로 날 초대했다. 하루가 이틀이 됐고 이틀이 일주일이 됐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집에서 준비한 노트를 보고 더듬더듬 대화했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기꾼을 찾습니다, 와 같은 문장뿐이라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지만 아주 느렸다. 어딘가 부족한 단어를 나열하면 엘로가 자연스럽게 문장으로 만들어 되묻는다. 그럼 나는 긍정 혹은 부정의 답을 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 응. 창문 열어줄까? 아니. 낮잠 잘래? 좋아.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확실했다. 그러다 가끔 엘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나를 쳐다봤다.
모처럼 물기 없는 오후, 햇살을 담요 삼아 소파에 누웠다. 오전 내내 포도밭을 살피다 들어온 엘로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허리끈이 느슨한 반바지 하나만 걸친 채 제대로 닦지 않은 몸으로 내 옆에 앉았다. 이슬을 두른 포도 넝쿨처럼 싱그러웠다.
오늘 기분은 어때. 좋아?
나는 상냥한 엘로에게 미소로 답했다. 엘로의 모든 질문은 현재였다. 내가 무얼 하던 사람인지, 어째서 이 집에 왔는지, 이렇게 오래 머무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묻지 않았다.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뻔뻔하고 한심하게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돌아갈 곳도 없는 사람처럼. 햇살과 엘로가 있는 이 나무집을 두고 서울로 돌아가는 일 따위 엄두도 나지 않았다.
포도밭과 작은 오두막을 제외하면 나무집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주방과 침실, 소파와 탁자가 놓인 거실이 전부인 곳이지만 가구가 많지 않아 넓어 보인다. 일주일에 한 번씩 흰색 트럭이 와서는 엘로가 만든 와인을 가져가고 음식과 생필품을 두고 갔다. 파는 와인에 비해 들여오는 물건이 훨씬 많았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차액은 현금으로 계산했다. 결국 적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유, 이것 좀 도와줄래?
지난번 비워낸 오크통을 씻어 말리는 날이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서둘러 오두막으로 나갔다. 열 대의 오크통 중 두 개가 비어 새로 채워 넣어야 했다. 오두막에는 창이 없어 어두웠고 알코올 증기가 빠져나가질 못해 숨만 깊게 쉬어도 취할 수 있었다. 서둘러 통을 들고 나오니 하늘이 흐렸다. 저쪽부터 몰려온 떼구름이 지나가나 했더니 기어코 비를 내렸다. 이곳에서 맞는 첫 비였다.
내일 해야겠다.
엘로는 내 손에 들린 통을 빼앗아 오두막으로 옮겨놓았다. 대신 내 빈손에 와인을 쥐여주었다.
나무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맑았다.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빗소리 때문인지 와인의 맛이 더 달고 시큼했다. 떫다가도 혀 안쪽에서 강력하게 맴도는 단맛이 코를 울렸다. 이곳에 온 뒤로 심심치 않게 마시고 있지만 매번 새롭다.
포도 좋아해? 내 물음에 엘로는 끄덕였다.
비바람이 거세지자 엘로는 잠시 밭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엘로가 나가느라 아주 잠시 열렸다 닫힌 문틈으로 자꾸 휘파람 소리가 났다. 똑바로 닫히지 않아 바람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다. 일어나기도 귀찮고 얼핏 귀신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견딜만해 그냥 소피에 계속 앉아 있기로 했다. 곧 엘로가 올 거고 그럼 틀림없이 웃으며 문을 꽉 닫아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그런다고 없어진 돈이 돌아와? 빨리 집으로 와.
언니였다. 내가 일부러 연락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지치지도 않는지 언니는 매일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아니, 애초에 어디로 돌아오라는 말이지. 모두가 나를 버린 곳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엘로가 보고 싶었다.
-
이유정. 일어나.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니 언니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갈증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 다리로 멀쩡히 선 언니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중국에서 크게 다쳐 큰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있다던 언니. 그 언니가 지나치게 성한 몸으로 내 앞에 있었다. 열어둔 창문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새벽바람이 몰아치는 옥탑방에서 어리둥절 서로 바라봤다. 언니는 정말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보냈느냐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전에도 그런 적 있었잖아. 다리 부러져서 급히 병원에서 치료 받았잖아. 이번에는 크게 다쳤구나 싶어서…….”
“그럼 먼저 확인을 했어야지. 정확히 어느 병원인지, 어디서 다쳤는지, 전화한 사람은 누군지 그걸 먼저 확인 했어야지.”
“병원에서 대사관으로 연락했다고 그랬어. 그래서 대사관 직원이 전화해준 거라고. 번호도 국제발신이었어. 언니한테 전화도 했는데 언니가 안 받았잖아!”
언니는 내 말에 기가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병신, 머저리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여행 중에 연락 안 되는 거 하루 이틀 일이야? 왜 돈을 보내. 왜.”
“언니가 그랬잖아. 이번 여행객들이 유난히 힘들게 한다며. 이러다가 사고 나는 거 아닌지 불안하다며…….”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먼저 정신을 차린 언니가 날 경찰서로 데려갔다. 신고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굳이 내 입을 통해 한 번 더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경찰은 내게, 언니가 난징 어느 고산에서 굴러떨어져 온몸의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정말 믿었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만 주억거리자 경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조사해 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인적사항 몇 줄과 꼭 잡아달라는 말만 남겨두고 나왔다. 내 20대를 바쳐 벌어놓은 돈이 가족의 목숨값이라면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낱 사기꾼의 배를 불렸을 뿐이라니. 그것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흘린 눈물이 아까웠다.
문득 진우 생각이 났다. 죽은 언니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곧장 달려와 다독여준 진우에게 모든 게 내 불찰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언니는 이틀 위 있을 다른 패키지 여행을 준비한다며 저녁도 먹지 않고 돌아갔다. 돈을 잃었으니 더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잃은 건 넌데 일은 내가 하네, 라며 문을 나서던 언니의 마지막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새삼스레 빈집이 공허했다. 원래 나뿐이던 공간에 혼자 남았다는 게 낯설었다. 낯섦이 낯설어 진우에게 전화했고 진우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금방 오겠다고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진우를 기다리는 동안, 그제야 실감이 났다. 피 같은 돈이 사라졌고 난 혼자였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진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근데, 언니는 어떻게 알고 꼭두새벽부터 날 찾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