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설에도 문이 열려있군요. 반신반의하며 왔는데, 열려있는 성당 문을 보고 안도했습니다. 근래 들어 제가 찾아간 곳들은 모두 저를 거부했는데, 이곳에서만 절 받아주는 것 같아요. 기도와 믿음에는 휴일이 없다는 의미일까요.
오늘 오전,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두 달 전 시술을 받았던 피부과인데, 꼭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었거든요. 시간이 지난 일에 대해 묻는 게 당황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설 연휴 첫날이라 오후에는 문을 닫는다고, 연휴가 끝난 뒤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만 듣고 병원을 나왔어요. 포기한 건 아닙니다. 그곳에 더 있어도 원하는 내용을 얻지 못할 게 뻔하니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병원 홈페이지에는 환자나 고객이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어요. 물론 작성자와 병원만 확인할 수 있는 비밀글이지만, 이곳에 올리면 확인은 할 테니까요.
두 달 전,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잔뜩 올라와 진료를 받았어요. 중, 고등학생 때에도 여드름 한 번 난 적이 없었던 터라 피부과는 처음이었는데, 하얀 대리석 바닥에 노란색과 주황색 그 사이쯤 되는 은은한 조명, 살짝 감도는 소독약 냄새가 신뢰감을 줬죠.
예약을 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꽤 오래 기다렸고, 그 사이 얼굴은 더욱 붉어졌어요. 따갑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자꾸만 손이 올라가려는 걸 막느라 바빴습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 하나, 싶을 때쯤 제 차례가 왔고 죄수가 독방에 들어가듯 고개를 숙이고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절 봐주셨던 의사분께서 그랬어요.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가 예민해진 상태에서는 미약한 피부 자극으로도 트러블이 발생할 수 있다고. 어제 태어나서 처음 다녀온 클럽에서 얼굴에 담배 연기를 많이 맞은 게 생각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죠.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집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얼굴이 따가웠었거든요. 제가 아파한다는 걸 아시고 곧바로 담배를 끊으셨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주변에 흡연자가 없었어요. 담배 연기를 맞으면 그런 얼굴이 되는 것도 잊고 살았죠.
약만 바르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사에 레이저 시술까지 필요하다고 하셨죠. 물론 레이저는 환자의 선택 사항일 뿐이라며, 약으로도 치료는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약으로만 치료할 경우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이미 손으로 건드렸던 부분들은 흉으로 남을 거라는 말이 뒤에 붙었죠.
흉지는 건 둘째치고, 최대한 빨리 얼굴에 난 불을 끄고 싶어서 레이저 시술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설명을 듣는 중에도 화끈거림이 멈추질 않았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의사가 다시 말을 이어가는 바람에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한번 트러블이 발생한 피부는 재발 가능성이 높아 영양분을 공급하려면 태반 주사를 맞는 게 좋다는 말이었어요. 태반 주사라는 어감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아 모두 받겠다고 했어요.
피부과 시술이 아픈 건 알았지만 마취까지 해야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죠. 태반 주사를 먼저 맞고 시술대에 누워 의사를 기다렸습니다. 시술대는 참 차가웠어요. 가죽 시트로 덮여있는데도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모를 냉기가 등골을 따라 몸을 감쌌습니다.
간호사 두 명이 먼저 와 마취제를 주입했고, 제 기억은 거기서 잠시 멈췄습니다. 나와 같은 담요를 덮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을 떴을 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시술로 인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손을 들어 간호사를 부르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병원에서 나오기 전, 시술은 잘 끝났고 재생 크림만 잘 바르면 흉터 없이 잘 가라앉을 거라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거울 속 제 얼굴은 병원에 가기 전보다 심각해 보였어요. 며칠 동안은 밖을 나갈 수 없어서 집에만 있었고 다행히 조금씩 피부가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태반 주사의 덕분인 건지 그 이후 지금까지 작은 뾰루지 하나 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다시 피부과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이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만족스러운 진료였습니다. 마취된 환자를 성폭행한 것으로 뉴스에서 보기 전까지는요. 간호사의 고발로 시술실 녹화 영상이 뉴스에 제보됐었죠. 제게 굳이 마취 시술을 권했던 그 의사였어요. 해당 의사는 면허 정지 3년과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고 들었지만 정작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물론 녹화 영상을 확인 후 피해자들을 추려 사건 접수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 외 환자들에게 피해자가 아님을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와서 그 병원이 망하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의사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미 그만둔 사람 때문에 병원이 피해를 입는다는 건 오히려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그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제 몸에 대한 의지를 잃었던 그 2시간 동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지 말입니다. 설령 정말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요. 무언가를 저지르기에 저는 너무 지쳐있거든요.
내일은 또 다른 곳에서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해야겠지요. 이미 시작한 일이니 마지막까지 포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내일 가 볼 곳이 마지막이기도 하고요.
밥은 잘 챙겨 드시나요? 전 잘 먹고 있습니다. 어제는 혼자 고기를 구워 먹었어요. 일부러 장사가 잘되지 않는 곳을 골라 점심 시간도, 저녁 시간도 아닌 때 들어갔습니다. 삼겹살 2인분에 소주 한 병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병원 게시글에는 아직 답변이 달리지 않았어요. 설 연휴와 겹쳐 확인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곳들을 찾아가고 있지만 이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서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혹시 아직도 제 속에는 떨어져 나가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는 걸까요.
마지막 장소는 클럽이었습니다. 정확히는 클럽에서 만난 사람의 집이지만요. 번호도, 이름도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그 사람 집이었어요. 칸막이로 막혀 있지만 신부님이 미간을 찌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은 정확히 모르지만요.
저는 술은 좋아하지만 클럽은 좋아하지 않아요. 입구부터 들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실내 흡연도, 제가 싫어하는 것 투성이거든요. 1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종강 파티가 열린 날,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클럽 방문이었고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1차로 치킨집에서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신 후라 많이 들떠 있었는지 동기들이 클럽을 가자는 말에 거절을 하지 않았어요.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고, 잠깐 있다가 술만 마시고 나오면 된다고 생각해 저도 간다고 했습니다. 클럽이란 게 앉아서 술 마시는 공간이 아닌 줄도 모르고요.
집에 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남은 4명끼리만 입장하는데 여자는 22살까지 입장료가 무료라고 했어요. 여자는 무료, 남자는 만원. 이게 무얼 뜻하는지는 안에 들어가서 알았죠. 성비가 맞지 않아 여자들은 모두 주위에 남자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고, 그걸 즐기는 여자와 아닌 여자. 딱 두 부류였어요.
노래 소리는 왜 이렇게 큰지, 스피커가 몸 속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어요. 쿵쿵, 울릴 때마다 온 장기가 같이 울려서 바로 옆 사람이 하는 얘기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몇 번 와본 동기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5,000원을 내고 겉옷과 가방을 맡겼어요. 파란색 비닐에 짐이 담겨 내 손을 떠나갈 때쯤 다시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 여기서 나가야겠다.
거대한 흡연 부스나 마찬가지던 그곳에서 비흡연자들은 제대로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어요. 짐을 맡기면서 받은 번호표를 동기가 가지고 있어서 최대한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나랑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먼저 집에 갈게. 사실 미안하진 않았기 때문에 동기에게는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어요. 집에 가고 싶어서 간다는데 미안할 이유가 없잖아요. 동기는 싱긋 웃더니 제 귀에 대고 말했어요. 방금 들어왔는데 지금 나가면 아깝잖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나도 막차 탈 거라서 한 시간만 있다 갈 거야!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음악 소리를 뚫고 귀에 꽂히자마자 동기는 사라졌습니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 섞여 열심히 춤추고 있었어요.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고 작은 동작으로 춤을 추는 저 모습이 출퇴근 시간 지하철과 뭐가 다른가, 싶다가도 여긴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게 다른 건가 하고 말았습니다.
저 친구를 다시 찾으러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도 싫고, 그냥 뒤쪽에서 한 시간만 버티자 싶은 생각이었어요. 춤은 출 줄도 몰랐고, 할 줄 아는 건 술을 마시는 것뿐이라 한 병에 7,000원이라는 미친 가격에도 맥주를 주문했어요.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기둥 하나에 기대어 홀짝였더니, 목이 말랐던 건지 맥주를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지 10분 만에 한 병을 다 먹어버렸죠. 아무리 맥주라도 빨리 먹으면 취하잖아요. 게다가 전 이미 술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더 빠르게 취한 거죠. 남은 시간 동안 술이나 먹자,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맥주를 더 시키려는데 그 사람이 말을 걸었습니다.
가장 밝은 조명을 등지고 절 바라본 터라 흴 정도로 탈색한 머리가 반짝여 보였어요. 그쪽은 본인도 혼자 왔는데 같이 술이나 먹자고 했죠. 그때 저는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정확히 50분 뒤에 친구와 같이 나갈 거니까 다른 사람 찾으시라 냉정하게 말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냉정하다기엔 술에 취해 발음이 많이 샜던 것 같지만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그 뒤로 맥주 한 병을 더 산 건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그 사람 집이었거든요. 그 클럽과 걸어서 10분 거리 골목에 있는 원룸이라고 했어요. 당황스러워서 이불을 들춰봤더니 옷은 제대로 입고 있었고 저는 침대에, 그 사람은 바닥에서 자고 있었어요.
깨워서 물어봤더니 제가 새로 시킨 맥주를 두 모금 넘기자마자 취해서 말을 걸었다고 했죠. 같이 온 친구에게 번호표가 있어 짐을 못 찾고 있으니 친구에게 말 좀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여차저차 짐을 찾아 절 데리고 나오긴 했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진 저를 어쩔 수 없이 집까지 데려온 거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데, 첫 번째로 당황스러웠고 두 번째는 창피했고 세 번째는 의심했어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옷이 전부 벗겨진 여자와 뻔뻔하게 말하는 남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얼마나 편협하고 편견이 가득한 사람인지 아시겠죠. 선의를 베풀어 길바닥에서 눈을 뜨지 않도록 해준 사람에게 오늘 또다시 찾아갔던 거예요.
직감적으로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알았어요. 옷차림도 멀쩡했고 숙취를 제외하면 몸 상태도 이상한 곳이 없었으니까요.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그 집을 나오는데 어렴풋이 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아요.
웃었든 웃지 않았든 제게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필요하단 겁니다. 그 사람은 불쾌하고 꺼려지겠죠. 그래도 필요해요. 저에 대한 주도권을 찾아오기 위한 일이에요. 지금의 저는 몸이 시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사람 같거든요.
무작정 찾아간 그 집에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니 기약이 없고, 다음에 다시 오기는 싫었어요. 어쩌면 다시 마주 보는 게 무서웠을지도 모르고요. 혹시 몰라 집에서 써 간 편지를 문 밑에 끼워두고 왔습니다.
제 번호와 주소, 제가 간절한 이유까지 벌써 세 번째 글로 남겼네요. 한 글자씩 적을 때마다 내게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구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어요. 그럼에도 굳이 이곳을 찾아와서 말로 내뱉는 건, 우습겠지만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기 위함입니다.
엄마가 알려준 곳이거든요.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도, 자신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줬을 때도 이곳에서 털어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을 때마다 꼭 성당 얘기를 하시면서 비워내라고 하셨죠.
고민이 무엇인지 직접 물어보지는 않으셨어요. 말하고 싶을 때가 되면 알아서 말하겠지, 하셨지만 물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말을 꺼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비밀은 차곡차곡 마음 한구석에 쌓여 커다란 벽을 만들었습니다.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가 나빠지거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만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았어요.
하긴, 가족끼리 비밀 없는 집이 얼마나 되겠어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죽음이 아니듯,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비밀이 없는 거죠. 신부님께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말하게 되네요. 남에게 이런 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에만 오면 애써 챙겨입은 갑옷이 벗겨지는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