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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y 30. 2023

  상춧잎은 벽을 뚫고

   지방 도시에 살고 있는 언니네 빌라 건물엔 열 두 가구가 산다.


거기엔 노부부도 살고, 아내가 러시아 사람인 젊은 부부도 살고, 혼자인 중년 여인도 살고 있다. 언니는 이 세 가구 외에는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 채 지내고 있단다.


대부분이 일을 나가고 있을 거란 추측만 할 뿐. 그곳의 공동 현관과 계단의 전기세, 정화조 청소비용 등을 열두 가구가 나눠 내야 하는데 이 일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여기서 오래 살고 있는 언니가 책임반장을 맡았단다.

   

언니는 그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 이걸 어떻게 공지할까 생각했다. 처음엔 그곳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입구 공동 현관문에 설명과 함께 송금할 계좌번호와, 계좌이체 못하는 분은 휴일이나 저녁 시간에 언니 집인 103호로 현금을 가져와달라고 종이에 써서 붙여 놓았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았고 현금을 가지고 오는 이도 없었다. 다음에는 같은 내용을 각 세대 현관문에 붙여 놓았다. 그래도 모두 반응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쉬는 날 언니는 그곳 사람들과 얼굴을 직접 보면서 얘기하려고 집집이 다니며 벨을 눌렀으나 한 집 외엔 만날 수가 없었단다. 언니는 그때 닫혀있는 문들이 두꺼운 벽처럼 느껴졌다.  

   

   농사가 힘들기보다는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동력의 기저엔 저릿한 핏줄들이 있다.


지금은 노지상추가 겨울과 봄을 지나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참맛세포를 건드리며 입안에서  실댈 때다.


  봄부터 농장에서 햇빛, 바람과 친구관계를 잘 유지해 온 상추가 무탈하게 자라있다. 나는 상추를 속만 남기고 바깥 잎들을 모두 뜯어 언니에게 보냈다.


상추를 받은 언니는 그것을 열두 봉지에 나눠 담고 ‘유기농 상추예요, 우리 나눠 먹어요. 103호에서’라고 쓴 메모를 상추와 같이 넣어 집집이 현관 문고리에 걸어놓았단다.  

   

이후 어느 날 저녁 언니가 일터에서 돌아오니 언니 집 현관 문고리에 메모가 들어있는 떡 봉지가 걸려있었다. ‘401호예요. 우리 먹으려고 사면서 하나 더 샀어요. 상추 잘 먹었습니다.’ 어느 날은 현미가 든 자루를  들고 직접 찾아온 여인도 있었다. 시골에서 현미를 보내왔는데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다며 그것을 밀린 공동 요금과 함께 내밀었다. 또 어느 날은 몇 호인지 메모도 없이 세숫비누 한 세트가 걸려있기도 했다.

   

너도 나도 우리가 안고 있는 고독의 무게는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 열리도록 노크하는 건 무거운 돌도 금속 기구도 아니며 야단스런 행동도 아니다. 침묵의 언어로 건네는 따뜻한 마음 한 줌이면 족하다.


이렇게 이웃의 마음에 들어간 상춧잎은 두꺼운 벽을 뚫고 나와 바깥에서 춤을 추고 있다. 떡으로 현미로, 세숫비누로 변신을 하고서.

   

   나는 밭으로 나가 이번엔 무엇으로 또 춤추게 할까 생각한다. 이제 막 여름마중을 나선다고 살랑대는 야채들을 둘러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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