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후기록 05화

느림을 마시다.

다례(茶禮) 입문기

by siwoo

올해도 어김없이 이제 내 나이 몇인지 모를 생일이 다가왔다.


아내가 올해는 뭘 갖고 싶은지 묻는다.

몇 년 전부터 이런 물음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붙기 시작했다.

제발 쓸만한 생일 선물을 요청해 달라고...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서도 IT 쪽에서 일하다 보니 신문물을 접하고 싶은 마음에 몇 번 그런 선물을 신청해서 받았다가 몇 번 쓰지도 않고 방구석에 박혀 있어서 그 이후로 생일이 다가오면 종종 핀잔을 듣고 있다. 중국산 값싼 드론이 그랬고 둘레길을 돌면서 멋진 영상을 만들어보고자 저 멀리 앞선 의욕을 가지고 선물로 받았던 고프로도 같은 운명...

아... 뭔가 구매할 때와는 다른 IT기기들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배신을 어쩌란 말인가?


올해도 이런 고민과 부담을 가지고 시작해서 어쨌든 가지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것저것 뒤적뒤적 찾아본다.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를 잘 안 마시고 차를 주로 마시는데 회사에서 항상 티백의 차를 우려서 먹는 편이다. 차를 마시는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다도(茶道)가 생각이 났다.


결혼 전에 양평의 용문사 템플스테이를 갔다가 거기 스님이 다도 시간을 내어서 차를 여러 가지 다기 세트를 이용하여 우리면서 천천히 한잔씩 줬던 기억이 났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큰 다기(숙우)에 담고 그 물을 다시 차주전자(다관)에 옮기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찻잔에 따라 주면 그것을 홀짝홀짝 마시고 그리고 다시 뜨거운 물에 그 찻잔을 헹구고 정리하는 모습이 뭔가 정갈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여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차를 마시는 시간과 행위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다도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니 다도(茶道)는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다례(茶禮)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그럼 나도 다례 세트를 사볼까?

요즘은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단식을 위해서 거를 때도 있어서 저녁 시간이 어정쩡한 시간이 많은데 자기 전에 그런 시간을 아내와 또는 아이와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좋은 생각이란다. 바로 검색하여 3인용 다도 세트를 얘기하고 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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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용인데 생각보다는 좀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뭔가 더 정갈한 느낌이 든 다례 세트였다. 이번에 구매하면서 추가적으로 생각한 것은 밑에 물을 퇴수 할 수 있는 찻상을 함께 구매하는 것이었다. 다기만 있으면 뭔가 따로 보관해야 할 것 같고 차를 마시는 하나의 통일성이 없어 보였는데 찻상을 구매하면서 뭔가 통일성과 보관이 용이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그리고 뭔가 더 있어 보여..)


숙우와 다관 찻잔 3개가 한 세트이고 대나무 거름망 은 아주 오래전에 구매한 것이다.

이 대나무 거름망으로 말하자면 지금부터 한 15년 전 막 결혼을 하고 아내가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 담양에 여행을 갔을 때 구매한 건데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신기하지.. 이런 다례 세트를 구입할 줄 알고 웬만하면 블랙홀처럼 사라지는 집안 물품 중에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어서 다례의 여정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차는 보이차를 먹고 싶었으나 우선 카페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아내와 나를 위해 카페인이 없는 우롱차와 케모마일차를 준비해 봤다.


내가 우선 수집하고 정리하여 진행해 본 나만의 다례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1. 다기와 찻상을 준비한다.

2. 데운 찻물을 물주전자에 넣는다.(물을 끓이거나 정수기에서 물을 주전자에 받아 놓는다.)

3. 물주전자의 물을 숙우에 부어 숙우를 데운다.

4. 숙우에 데운 물을 다관에 넣어 데운다.

5. 다관의 물을 찻잔에 넣어 찻잔 역시 데운다.

6. 다기의 데운 물을 모두 버린다.

7. 숙우에 다시 물을 넣고 잠시 기다린다.

8. 기다리는 사이에 다관에 찻잎을 넣는다.

9. 숙우의 물을 다관에 넘치게 넣고 잠시 기다린다. (찻잎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10. 다관의 물을 찻잔에 나눠서 넣는다.

11. 잠시 기다린 후 찻잔의 차를 두 번 또는 서너 번에 나눠서 마신다.

12. 계속 마실 것을 준비하여 숙우에 물을 넣어 놓는다.

13. 다 마신 후 남은 숙우 물에 찻잔을 기본적으로 헹군다.

14. 다관의 차를 버리고 다관을 행군 후 퇴수받침의 물을 버린다.

15. 기본 물기를 닦은 후 찻상을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기본적인 행위는 단순한데 이렇게 순서를 붙이니 많아 보인다. 근데 내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차를 마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해서 준비부터 진행하는 "하나씩" 하는 그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하나씩 작은 행동을 위해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본 적이 언제였던가?


우리는 너무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 점심을 먹으로 가려해도 줄이 긴 음식점은 패스를 하고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먹어야 하며 키오스크로 빨리 주문해서 바로 나온 음식을 먹고 바로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그것도 못 참겠으면 자판기를 이용해야 뭔가 시간을 아껴서 뿌듯하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시대에 이렇게 "하나씩" 뭔가를 해서 마시고 먹는 행위를 하면서 현재의 나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다례의 "례(禮)"이고 다도의 "도(道)"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했더니 준비하는 나도 마시는 나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렇게 다례의 례를 생각하면서 차를 마시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이 들면 뭔가 좋은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들게 된다. (우리 집 사춘기 그녀는 못 참고 원샷을..)


경험을 해보니 왜 차를 마시는 행위에 "례"또는 "도"를 붙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차를 준비하는 마음, 차를 마시는 마음, 차를 마시며 누군가와 또 얘기할 수 있는 온전히 시간이 그저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으로 자각하고 나의 시간으로 만드는 그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한 잔의 차로 마음이 맑아지고, 두 잔의 차로 생각이 비워진다."

- 초의선사(草衣禪師) : 조선후기 선승(禪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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