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여고생
18. 고등학교 앞, 실외, 저녁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는 학생들.
현철이 가방을 매고 밖으로 나온다.
사복 차림의 여고생 하나(여, 17세)가
후다닥 뛰어와서는 현철에게 팔짱을 낀다.
하나:
쌤! 여고생이 왜 아저씨를 사랑하는지 아세요?
현철:
(하나의 팔짱을 풀며) 은교?
네 나이에는 그 영화를 보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
하나:
어머? 쌤도 그 영화 봤어요?
생각보다 응큼한 데가 있네. 선생님 저질.
현철:
아, 그 나이에는 그런 거 밖에 안 보이는 건 알겠는데.
그 영화는 말이다. 나이가 다른 세 사람이 서로에게
결핍된 능력을 질투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이야.
운명의 장난 같은 거지.
좀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욕망 같은 거라고.
너는 여고생이 남자 유혹하는 장면 밖에는
기억이 안 나겠다만.
하나:
아, 안 들려요. 안 들려. (고개를 도리도리)
현철:
아, 이런. 안 되겠네.
하나:
제가 뭘요?
현철:
아니, 내가 문제다.
하나:
네?
현철:
애 앞에서 잘난 척이나 하고. 꼴불견이다, 진짜.
하나:
그럼 반성의 의미로 김밥을 쏘세요. 난 참치 김밥.
19. 분식집, 실내, 저녁
하나가 허겁지겁 라면과 김밥을 먹는다.
현철은 먹는 둥 마는 둥.
현철:
근데 내가 너 호구니? 맨날 나만 찾아오게?
하나:
호구가 좋은 거라면서요?
남에게 계산 없이 아낌없이 주는 거. 쌤이 한 말인데.
현철:
아, 교육자로서 실격이네.
아깐 잘난 척에 이젠 언행불일치라니.
하나:
(라면 국물 한 사발 들이키고)
근데 잘난 척 하는 게 나쁜 건가?
그냥 다 사랑받고, 인정도 받고 싶고
그래서 그러는 거잖아?
아는 척도 하고, 가진 척도 하고.
사람이 다 그러고 살지 않나요?
현철:
다 그런다고 올바르다고 할 순 없지.
하나:
쌤은 어쩔 땐 참 어렵게 사는 거 같아요.
되게 자유로운 거 같아 보이는데,
뭔가 진지할 때는 또 끝이 없고.
현철:
내가 그러냐?
하나:
그러니까 강의가 재미없죠. 눈으로 먹는 수면제라니까.
현철:
와,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하나:
(카운터를 향해) 여기 떡볶이도 좀 주세요.
(현철에게) 뭐 그래도 저는 선생님 맘에 들어요.
어쩔 땐 말만 들어도 은근 멋있기도 하고.
뇌섹남이 이런 건가?
현철:
헐. (기가 차서 팔짱을 낀다)
하나:
쌤은 제가 별로에요?
현철:
일단 법적으로 안 된다는 건 알 거 같은데.
하나:
아니, 꼭 사랑은 어른들끼리만 해야 되나요?
그런 건 누가 정했나 몰라.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하잖아요?
현철:
아, 이럴 때 쓰라고 명대사가 있지.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하나:
아아, 안 들려요, 안 들려!
(정색하며) 뭐 그리고 제가 평생 열일곱이겠어요?
고등학교도 언젠간 졸업할 거고.
현철:
(젓가락을 다시 집더니) 너 좀 진지하게 말하는 거 같으니
나도 답변을 드리자면, 네가 하나 잊은 게 있는데
(사이) 나 유부남이다. (김밥을 하나 먹는다)
하나:
사모님 SNS를 봤는데, 선생님 사진 다 지워졌던데요.
이혼? 아님 별거?
현철:
(놀라서) 와. SNS는 인생의 낭비라더니 참.
비밀이 없구나, 세상에는.
하나:
뭐 결혼도 한 번 실패했으면 다음번엔 잘 하지 않을까요?
시험도 오답노트가 필요한데,
뭐 사랑도 결혼도 경험이 없는 것보단 낫죠.
현철:
(한 방 맞은 얼굴이다) 아이고.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하나:
왜요?
현철:
입맛이 확 사라지네.
하나:
(농담으로) 혹시 나 땜에? 상사병 같은 거?
현철이 어이없어 하는데,
그 순간 주문한 떡볶이가 탁자에 탁 놓인다.
하나:
오,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