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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리 Oct 19. 2023

사카모토 료마는 모든 일본인의 아버지입니다.

2013. 9.


  셰어하우스에서 저녁에 파티가 있었다. 파티를 하면 주변에 사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다 같이 거실에 모여 타코야끼나 오코노미야끼를 구워 먹거나 키야끼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는 한국 요리 파티를 열어서 김밥, 떡볶이, 부침개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런 요리들을 안주 거리로 하여 각자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었다. 내 옆에 또래 남자애가 앉아 있었는데 어떤 인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락페 기념 티셔츠인가?’


  혼자 생각하다가 티셔츠에 그려진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는데, 록밴드 보컬이 아니라 사카모토 료마라는 일본 역사 속의 위인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모든 일본인의 아버지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카모토 료마라는 이름을 그전에도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오노상이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해 서양의 식민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알아보니 메이지유신(1868)을 이룬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일본인이 존경하는 인물 설문조사에서 항상 1, 2위를 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나는 일본 역사를 몰라서 사카모토 료마는커녕 메이지유신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유신』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1800년대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1800년대 초반 에도 막부 정권은 네덜란드 상인들과 최소한의 물품 거래만 하는 쇄국 정책을 펴고 있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기항해 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1856년에는 미국 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내항해 교섭을 시작했고 1857년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불평등 조약이었고, 여러 지역에서 근왕 운동*이 일어났다.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1850년대 서양 세력의 위협에 의한 긴장 상태는 일본 전역의 사무라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능한 다이묘(大名)*들의 정책 결정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고, 하급 무사인 사카모토 료마와 도사 번**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양이(攘夷) 사상이 지배 계급에 대한 적개심과 결합되었다.

*넓은 영지(領地)를 가진 무사

**사카모토 료마가 속했던 번(=다이묘의 영지)


  도사 번에서 다케치 즈이잔의 도장은 근왕론 사상의 중심지였다. 1861년 도사 근왕당이 결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즈이잔의 문하생이었던 료마도 포함되었다.

  1862년 료마는 탈번했다. 그리고 가쓰 린타로를 암살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그의 이야기에 감화되어 노선을 전환해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린타로는 1850년 무렵 난학* 연구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린타로는 막부에 서양 지식의 학습을 목적으로 한 학교 설립을 주장해,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가 설립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에도시대,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등

**서양 오랑캐의 서적을 연구하는 기관


  린타로는 아편전쟁에서 서양의 우위를 확인하고, 외국에 대한 전면 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1862년 막부에서 조직한 해군을 대표하는 직책을 맡았고, 1864년 군함부교에 임명되었다.

  린타로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연합해야 일본이 외세와 맞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이 일본과 협력한다면 별다른 손실 없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일본의 번들이 힘을 합쳐 외세에 맞서는 것처럼, 아시아 국가들 역시 힘을 모아 서양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업적 실력에 기초한 군사력을 양성해, 강요된 개국을 국가적 이익을 창출할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863년 린타로가 쓴 일기를 살펴보면, 그가 기도 고인과 그의 동료에게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될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득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조선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들에게, 오늘날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유럽 국가들에 어떤 식으로든 저항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을 단지 조잡한 수준으로 모방하고 있을 뿐, 어느 나라도 장기적인 정책을 세우고 있지 못하는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나라에서 배를 띄워 보내, 아시아가 존속해 나가려면 서로 연대를 맺어 강력한 해군을 건설해야 하며, 만약 과학 기술을 제때에 개발하지 못한다면 서양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아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조선과 교섭을 시작하고, 이어서 중국과도 교섭해 나가야 할 것이다.


  료마는 린타로를 보좌하면서 막부의 진보적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863년 린타로는 고베 효고에 해군조련소와 조선소를 세웠고 료마는 해군조련소의 훈련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막부는 1863년 해외 각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사절단은 각종 통상 조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얻어 낸 이권을 포기하도록 서양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조슈 번의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수용했다. 게다가 프랑스 협조를 얻어 시모노세키 해협의 재개방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했다. 1864년 서양 국가들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했다.

  료마는 조슈 번과 막부를 동시에 비판했다. 외세의 힘을 빌려 이익을 취하려는 막부의 행태에 료마는 분개했다.


  “조슈가 처벌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외세의 손을 빌려 황국의 동포들을 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잘못된 일입니다.”


  료마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길은 막부 조직의 개혁뿐이라고 주장했다. 1864년 린타로는 해군부교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린타로는 해임 통지를 받은 후, 사쓰마 번 지도자에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힘을 보태 달라는 부탁을 했다.

  1864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료마를 사쓰마 사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개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러 번 간의 협력을 구상했다. 에도 막부는 조슈 번을 처단하려 했지만, 다카모리는 료마가 내세운 조슈와의 협력에 동조했다.

  도사의 낭인 나가오카 신타로는 국가 단결을 위해서는 두 거대 번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막부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중앙 집권화 된 ‘근대적 전제정치’를 수립하려 한다는 의혹이 퍼지면서, 번주들은 막부의 2차 조슈 정벌 요청을 거절했다. 서구 열강은 이미 체결된 조약들에 대해 천황의 최종 동의를 요구했다. 이 무렵 료마는 린타로 밑에서 습득한 항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사쓰마 번에서 가이엔타이(海援隊)*라는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 나가사키에서 료마는 외국 상인들과 교섭했다. 료마의 상회는 막부의 봉쇄 조치가 내려진 조슈 번의 외국 무기 입수를 지원했다.

*해상 지원 부대


  1866년 료마는 조슈 측의 기도 고인과 사쓰마 측의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대담을 열어 두 번을 중재했고, 협정안이 타결되었다. 료마는 증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삿초협정(薩長協定)*이라 한다. 삿초동맹의 성립으로 막부가 번을 억압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회복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료마와 신타로는 가이엔타이를 통한 무역활동을 하면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에 도사 번을 가담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 체제 구축을 위한 사상적 교류도 하였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


  막부와 조슈 사이 전쟁이 발발했고, 료마는 시모노세키 해협에서의 해전에 참전했다. 삿초동맹으로 인해 2차 조슈 정벌은 막부 측의 완패로 끝났다. 그 후 료마는 도사 번으로부터 탈번에 대한 사면을 받고 가이엔타이의 수장으로 인정받았다.

  1866년~1867년 동안 일본 전역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증강을 위한 노력, 서양과의 무역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이는 료마의 근거지였던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의 서양 무역상들은 번들에 군사 기술, 서양 견문의 기회를 제공했다.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는 번 중앙 정책 기관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근대적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무기와 기술 수입을 위해 가이세이칸(開成館)이라는 기구를 제시했다. 1865년 설립된 가이세이칸에는 해군 발전 담당 부서, 영어, 프랑스어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의학교, 도사 번 특산물 생산을 담당하는 권업국, 매장 자원 개발을 담당하는 광산국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외국 선박, 기계류 등 구입을 담당하는 사무소가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설치되었다.

  나가사키는 호상(豪商)들의 중심지였다. 고토 쇼지로가 1867년 봄에 나가사키를 떠나자, 도사 번 직영 상단의 경영은 훗날 미쓰비시의 창업자가 되는 이와사키 야타로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우선 무역소의 수입 증대를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예를 들면, 일본 근해에는 번 영토의 확대와 이윤 증대를 보장할 수 있는 무인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나가사키에 있는 조선인들과 접촉하면서 야타로는 여전히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조선과의 무역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조선은 세계 시장에 무지했기 때문에 조선의 물자를 값싸게 구매하는 한편, 외국의 물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무역의 중계항으로 그는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 울릉도를 선택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배 한 척을 준비했고, 국제법에 따라 섬에 대한 권리를 선포하는 팻말까지 배에 실었다.

  대일본국 도사 번의 명을 받은 이와사키 야타로, 이 섬을 발견함.

  이와사키 야타로의 기대와는 달리 이 섬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원정대는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료마는 홋카이도와의 교류 및 무역 확대를 꿈꾸었다. 사쓰마 번의 고다이 고모아쓰 또한 홋카이도와 관련된 계획을 추진했고,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서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교역안을 제안했을 때 조선 측이 보여 준 극단적인 거부 반응은 일본에게 경악으로 다가왔고, 이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강제적 근대화’라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이는 메이지 초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인식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메리의 생각>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입장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조선과 일본은 쓰시마 번주를 통해 교역을 해왔다. 이러한 이유는 양국의 정치체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은 왕조 국가이고 일본은 막번제국가였기 때문에 서로 대등한 외교 관계를 위해 일본 쇼군과 조선 국왕의 아래에 위치한 쓰시마 번주를 통해 교역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는 기존 외교 관행에서 벗어난 용어를 사용하여 조선에 신정부 수립을 통고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외교문서 수령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는 다이묘들을 억압하려 했고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서는 토막(討幕)*전쟁을 계획했는데, 료마는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1867년 선중8책이라는 8개조 강령을 제시했는데, 이는 메이지 정부 포고문의 원형이 된다. 또한 료마는 사쓰마 번과 도사 번 지도자들을 설득해 삿도맹약(薩土盟約)도 이루었다. 친막부파 다이묘들은 여러 조직들을 만들어 료마와 같은 유신 혁명가들을 위협했다. 1867년 메이지 정부 수립을 보지 못한 채, 료마는 신타로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함께 암살되었다.

*막부 토벌




<메리의 생각>


  사카모토 료마(1836-1867)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그가 태어나고 활약했던 1800년대 일본의 상황에 대해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메이지 유신에 활약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이 인물들이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정한론(征韓論)*이 나왔을 때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사카모토 료마가 요절하지 않고 메이지유신 이후 다른 인물들도 그러했듯이, 메이지 정부 고위직에 있게 되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도 궁금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평화를 원하는 인물로 남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더 존경받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에도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정부 초기에 등장한 조선침략론


  1800년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까지 일본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면서 ‘1800년대 조선은 어떠했나.’를 생각했다. 1801년 정조 사후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였고, 김조순의 딸과 결혼하면서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도정치는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까지 60여 년간 계속되었다.

  1832년 영국 로드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는데 중국의 허락 없이는 통상을 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1863년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하야할 때까지 10여 년간 쇄국 정책을 펼쳤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강요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는 청군을 불러들여 진압했다. 1884년 갑신정변은 일본군에 의존해 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창덕궁을 공격하면서 실패했다. 이때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 파견 시 상대국에 통보한다는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했고, 톈진조약을 구실로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1895년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봉황수(鳳凰愁)


조지훈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秋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하리라.


  시구(詩句) 중 ‘큰 나라’는 중국, ‘거미줄 친 옥좌(玉座)’는 국권 상실을 의미한다. 이 시는 조선의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해 비판하고 망국의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180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모두 쇄국정책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과의 통상을 주장한 이규경, 최한기 외 토지개혁과 농업의 안정을 주장하고(중농학파), 상업 발달과 기술개발을 주장한(중상학파) 실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농학파에는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중상학파에는 농암 유수원,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와 같은 학자들이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생전에, 그리고 유배생활 동안 『마과회통』,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목민심서』, 『흠흠심서』, 『탕론』, 『원목』, 『전론』, 『기예론』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근검(勤儉), 효제(孝悌)를 강조하고, 가문이 망했어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며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여러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네 가지 있다.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두려워해야 하며, 더 위로는 조정을 두려워하고 또 더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목민관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상 대간과 조정뿐이고, 백성과 하늘은 때때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많은 한시들도 남겼다.


탐진촌요(耽津村謠)


정약용(丁若鏞)


棉布新治 雪樣鮮 면포신치 설양선

(새로 짜낸 무명이 눈처럼 희고 고왔는데)

黃頭來博 吏房錢 황두래박 이방전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빼앗아 가네.)

漏田督稅 如星火 누전독세 여성화

(누전 세금의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三月中旬 道發船 삼월중순 도발선

(삼월 중순에 세곡선(稅穀船)이 서울을 떠난다고)


  이 한시는 조선 후기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을 쓴 시이다.

  ‘만약 그 시기에 정조와 같은 임금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신하의 만남이 한 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당시 성리학이 아니라, 실학자들의 주장이 주류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 보았다.




  19세기 이래 조선이 점차 쇠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세계 정세의 변화와 국제 무역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위정자들이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적절한 대책을 강구했더라면 한국의 근대 국가를 세우는 데 실패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을 어찌 죽은 사람 이빨 세는 일과 같은 부질없는 공상이라고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참고도서>

마리우스B,잰슨 지음, 손일, 이동민 옮김, 2014, 푸른길, 『사카모토료마와 메이지유신』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1991, 창비, 『유배지에서 온 편지』

정재정, 2007, 효형출판, 『교토에서 본 韓日通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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