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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리 Oct 22. 2023

요시노가리 유적 VS 레고랜드

역사 인식 차이 - 같은 상황, 다른 선택

2015. 2. 16.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에 다녀왔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은 일본의 야요이시대* 마을 유적을 보존, 재건하여 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일본 최대의 유적으로 면적이 73.7ha(73만7천㎡)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한국의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년경~기원후400년경) 무렵


  환호(環濠), 목책(木柵), 움집 등 청동기 시대 마을을 모형이 아닌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수혈주거(竪穴住居)*, 고상주거(高床住居)** 등 다양한 형태의 주거지들뿐만 아니라 망루(望樓)***, 제사로 사용된 건물들, 직물 창고, 곡물 창고, 벼이삭 창고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창고들, 발굴된 수백 기의 옹관묘(甕棺墓)****들도 재현해 놓았다.

*땅을 파서 조성한 주거지, 움집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높게 띄워 만든 주거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 지은 건물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


  이 넓은 공간을 이렇게까지 재현해 놓은 것, 세세히 설명을 해 놓은 것에 감탄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별 게 아니고 ‘문화유적(文化遺蹟)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고랜드와 관련된 기사를 볼 때마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을 떠올렸다. 그래서 요시노가리 유적, 춘천 중도유적(現 레고랜드)과 관련된 글들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나라 7개 문화재발굴전문단체가 구역을 나눠 4년여에 걸쳐 춘천 중도유적발굴조사를 끝낸 후 이 유적을 한마디로 ‘한국고고학 역사상 청동기시대 최대의 마을유적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고고학 발굴역사상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의 이 마을유적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일부는 철거하고 모두 복토해서 강원도(LL공사)와 영국 멀린사(Merlin entertainments)가 올해 안에 레고랜드를 착공하겠다고 한다.


  춘천 중도유적은 이미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차례 발굴조사하고 그에 따른 보고서 5권이 나왔다. 이외 1980년대에도 270여 기의 유구가 발굴되고 2010년에는 소위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따른 발굴조사에서도 200여기의 유구가 발굴조사 되기도 했다. 2013년부터 시작된 레고랜드 사업부지 내 1단계 발굴조사에서 1,400여 기의 유구가 발굴되었고 2015년 2단계 발굴조사에서도 650여 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 마지막 단계 발굴에서는 1,243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이 레고랜드 조성 예정부지 내에서 총 3,000여 기의 유구가 발굴조사 된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 유구 대부분이 청동기시대로 밝혀지고 있다.


  중도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지석묘(고인돌무덤) 36기가 A1구역 B1지역에서 남북으로 240m 거리에 이르는 장소에 대·중·소규모로 “위계(位階)”질서를 유지하며 분포되어 있었는데 (발굴)전문가 현장검토회의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이를 이전(移轉) 복원(復元)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2014년 12월 동절기에 A1구역 B1 지역의 36기의 지석묘가 훼손(毁損) 철거(撤去)되었다. 2016년 10월에는 C2구역에서 발굴 조사된 19기의 지석묘도 레고랜드 주차장 건물 용도로 훼손 철거하였다.


  문화재청과 강원도는 발굴 조사된 유구 가운데 청동기시대 환호(環濠)지역 61,500㎡와 동안(東岸)의 철기-삼국시대 유적 32,000㎡만을 보존하고 중도(127만㎡) 안에서 발굴 조사된 ‘한국 청동기시대 최대의 마을유적’은 훼손 철거되거나 이미 발굴 조사된 3,000여 기의 유구는 기록으로만 남기고 모두 매립(埋立) 복토(覆土)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중도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후기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통사적(通史的)으로 관통(貫通)하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곧, 한국 역사의 축소판(縮小版)이나 다름없다.


  중도유적은 대부분을 훼손하고 레고랜드 놀이공원을 만들고 일부만을 보존하는 당국자의 말대로 건설과 보존이 상생(相生)할 수 있는 유적이 아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해서 절대로 상생할 수 없는 유적이다.


중략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규슈(九州) 북부지역인 사가현(佐賀懸) 칸사키(神崎)에 위치한 야요이(弥生) 시대의 마을과 묘지 유적이며,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국가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의 가치는

① 일본을 대표하는 야요이 시대 최대 규모의 이중 환호와 취락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고, 취락과 주변자연경관이 잘 남아 있다는 것.

② 야요이시대 전기부터 중기, 후기 취락의 발전을 잘 볼 수 있고, 일본 열도 내에서 나라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

③ 야요이 시대의 분구묘로서는 초기의 것이며, 권력의 분화의 과정을 알 수 있는 것.

한반도계 석기, 무문토기, 송국리형 주거지, 세형동검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한반도와의 문화교류의 양상을 알 수 있다는 것.

⑤ 동탁(銅鐸)이 출토되어 이즈모(出雲) 지역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것.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의 교류의 창구인 대마도(対馬), 이키섬(壱岐), 카라쯔(唐津) 루트 외에 서적 아리아케(有明)해 루트를 생각할 수 있는 것.

⑦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의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기술에 아주 유사한 유구들이 발견된 것

등이다.


중략


  1981년 6월 요시노가리 일대에는 칸사키공업단지(神崎工業団地) 개발이 계획되었다. 사가현은 농업을 생업의 중심으로 된 그다지 주요한 산업이 없는 현이었다. 그래서 새 산업을 유치하여 새로운 고용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요시노가리 유적 주변에는 많은 유물의 산부지로서 일찍부터 고고학계에 알려져 있어서 문화재 조사가 중요한 과제였다.

  칸사키공업단지의 개발 구역은 67.6ha 중요한 유적 부분 4지전 6ha를 문화재녹지로서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중략


  요시노가리 유적의 시와야연노쯔보(志波屋四の坪) 지구부터 조사가 시작되었다. 독무덤 줄은 약 650m 이어지고 있고 조사구에는 남북 약 230m, 동서 약 40m의 범위로 약 530 기의 독무덤, 석관묘 70기가 조사되었다. 그 독무덤에는 머리가 없는 인골이 출토되고, 또 10개의 부장분이 아닌 화살촉이 독무덤 안의 뼈에서 확인된 예는 당시의 전쟁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조사가 안 된 부분도 포함하여 독무덤은 3,000기 이상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략


  문화재 사이드와 언론 간의 연계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이런 성과의 일부를 보기만 해도 요시노가리 유적이 특별한 유적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개발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이때, 공사계약은 종료하고 있어, 공사의 준비는 완료된 상태였지만, 공사를 담당하는 업자를 발굴 현장사무실로 안내해 유물을 보여주면서 유적의 중요성을 말하고 佐原 선생이 방문 예정인 22일까지 공사 시작을 기다릴 수 있도록 호소했다. 열의가 통해서 공사를 며칠 연기할 것을 승낙했다.(七田 1991)


중략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요시노가리 유적에 밀어닥쳤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시치다타다아키(七田忠昭)는 저서에서, 그때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다음 24일은 쇼와 천황의 타이소우노레이(大葬の礼)에서 휴일이 된 것도 있고, 아침 일찍부터 많은 관람객으로 유적이 몹시 혼잡했다.」(七田, 1991)


중략


  이러한 가운데서 1989년 2월 27일에 타가시마후에아(高島忠平, 당시 사가현교육위원회 문화과참사)가 도쿄에 가서 문화청에 대해 “규모, 출토품 등에서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요망했다. 문화청(文化庁) 기념물과의 카와하라수미유키(河原純之) 문화재 조사관은 “사적 지정을 하고 싶다면 좀 더 폭넓게 조사하고, 유적의 실태를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해서 유적지정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 3월 10일부터 조성 시작할 계획이었던 칸사키공업단지 개발에 대해서 유적의 보존 범위를 더 넓히는 등의 계획 재검토를 현 교육위원회에 역제안했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유적을 남기고 싶은 문화재 측과 조금이라도 더 개발하고 싶은 개발자들 사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중략


  요시노가리 銅劍이 출토된 순간이었다. 보도 기자들은 항상 요시노가리에 가득 차 있었다. 高島忠平은 보도진에 긴급기자 회견을 열어 즉석 그 발견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렸다. 주홍색으로 칠한 독널관에서 출토된 유병동검과 아름다운 감벽색을 한 유리제 관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七田씨는 「이것으로 요시노가리 유적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란 촉감을 갖고 있었다.」(七田 1991) 그러나 유적은 아직 보존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3월 7일에 분구묘를 시찰한 香有知事는 「정말 훌륭하다」고 말하고 시찰 후의 기자회견장에서, 「일본전국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문화청과 협의를 하면서 사적 지정을 요망해야 한다. 환호취락은 물론, 분구묘에 걸친 구역이라도 넓게 범위를 남겨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것으로 유적을 남길 수 있겠다.」 발굴사무소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흥분했다. 그리고 기자들은 박수를 쳤다. 그가 요시노가리 유적 보존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七田 1991)

  이렇게 해서 1998년 3월에 키쯔키(香有) 지사의 결단에 따른, 칸사키공업단지(神崎工業団地) 개발 계획은 완전히 중지되면서 요시노가리 유적은 전면 보존과 그 후의 공원 정비 방침이 확정됐다.


중략




  중도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모두 1,200여 동(棟)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70여 기의 고인돌무덤(支石墓)은 세계적인 유적이다.


   중도유적에서 모두 3000기에 가까운 많은 유구가 발굴되었다.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구역 내에서 발굴된 최대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유적이다.




  야요이 시대의 변화는 토기에서도 나타난다. 조몬 시대 말기까지는 얕은 바리와 깊은 바리가 주류를 이루지만 야요이 시대에는 저장용 단지, 취사용 항아리, 음식용 굽다리접시, 바리 등이 많이 제작된다. 이는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생업경제와 식생활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채집경제와 생산경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저장용 단지 사용의 유무인데, 이는 한반도 민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처럼 일본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농경문화 요소와 더불어 이루어진 기술 혁신과 사회 변화는 기존의 일본 사회에 새로운 집단관계를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잉여 생산물에 의해 얻어진 부는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집단 사이의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야요이인들은 이웃 마을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거대한 환호環壕 마을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 가운데 요시노가리 유적은 규슈에 있었던 가장 큰 환호 마을이다.




<메리의 생각>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될 때 왜곡에 사람들은 민감한 것 같다. 어느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될 당시 역사 왜곡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했었는데, 그에 반해 ‘그럴 거면 다큐멘터리를 봐라’는 의견도 많았다.

  언젠가 tv에서 우연히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어느 유대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영화가 인상 깊어서 영화에 대해 더 알아보니 그 유대인의 수기도 책으로 발간되어 있었다. 책을 사서 봤는데, 책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영화로 재현해 놓았다는 것, 굳이 실화를 왜곡하면서까지 각색(脚色) 하지 않고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었다.

  레고랜드 공사 내내 문화재 보존에 대한 문제 제기들이 있었고 개장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반해 ‘유적을 보존해서 공원으로 만들어봤자 지루해서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이고 놀이공원으로 개발하는 편이 낫다’라는 의견도 많다.


  정말 그럴까?



<참고도서>

이형구,2020,『춘천 중도유적의 학술적 가치와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회의 논문집』,학연문화사

국립중앙박물관,2007,『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


방문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일이기도 하고 너무 넖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2017년 요시노가리 방문객 수는 70만 명이었고 아직 미발굴 지점이 남아있다고 한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주소


吉野ヶ里歴史公園

〒842-0035 佐賀県神埼郡吉野ヶ里町田手1843

TEL:0952-55-9333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가는 길


<후쿠오카 공항 출발>

地下鉄福岡空港駅(지하철 후쿠오카공항역)→

<地下鉄:5分>(지하철 : 5분)

→地下鉄博多駅(지하철 하카타역)

※JR乗換(JR환승):5~10分

JR博多駅(JR하카타역)→

<鹿児島本線(가고시마 본선)〔久留米(구루메)、大牟田(오무타)、熊本方面(구마모토방면)〕または長崎本線(또는 나가사키본선)〔佐世保(사세보)、長崎方面(나가사키방면)〕:特急約20分(특급 약 20분)、快速約30分(쾌속 약 30분)>

→JR鳥栖駅(JR도스역)

JR鳥栖駅(JR도스역)→

<長崎本線普通列車下り(나가사키본선 보통열차 내려감)〔佐賀方面(사가방면)〕>→JR吉野ヶ里公園駅(JR요시노가리유적공원역)(約14分)(약 14분)

またはJR神埼駅(또는 JR간자키역)(約17分)(약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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