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양, 마이켈, 수정, 나 이렇게 넷이 유엔의 작은 방에 모여 다과회를 했다. 일본어로 여자들로만 구성된 모임을 죠시카이(女子会じょしかい)라고 한다. 마이켈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대로 지금 이 모임은 죠시카이라고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가 역사,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와 수정이는 한국은 아직도 일본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안 좋은 감정이 남아있다고 얘기했다. 반면에 홍콩인인 카양과 마이켈은 식민 지배를 했던 영국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고 오히려 고맙게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그 얘기에 나와 수정이는 놀라서 “민족 감정이 없는 것 같다.”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니 카양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 이유가 80년대에 중국이 홍콩을 다시 병합하려고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홍콩, 대만 친구들에게서 느낀 것은 식민 지배를 했던 영국,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중국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별개로, 중국 정부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인 친구조차도 “중국은 누구나 싫어하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궁금했던 점(홍콩, 대만 친구들의 친일, 반중에 대한 이유)이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들어간 회사에서 회사 동료가 사무실에 가져온 책을 보다가 궁금했던 점이 조금 풀렸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제로 강의가 진행된 후 문답시간이 이어졌다. 같은 일본 식민통치를 경험한 한국과 대만의 일본통치기에 대한 평가는 다른 점이 많다고 설명하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 세대의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들어본 경험이 있거나, 아니더라도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타오위안국제공항 관세국에서 근무한다는 50대 중반의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팔순에 가까운 우리 아버지는 여전히 일본통치기와 일본인들을 그리워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일본을 그리워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일었다. 나는 손을 들고 이렇게 반박했다. “일본을 그리워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일본은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배한 국가인데, 식민지 지배가 그립다니요? 죄송하지만 한국인으로서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정말 잔인하였고,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나의 격앙된 반응에 좀 머쓱해진 그분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대만은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근대화도 되었고, 거기에 다른 지배자들에 비해 일본의 대만통치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일본을 그리워하시는 것이고요. 게다가 아버지는 일본어를 중국어(베이징 표준어)보다 더 능숙하게 구사하시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논쟁의 확산을 막으셨다. “한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는 기간도 달랐지만, 통치방식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일본의 대만통치는 한국에 비해 훨씬 온건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겠는데, 역대 조선총독은 전원 육군대장으로 임명된 점에 비해, 대만총독의 절반 정도는 문관이었고, 무관이라도 상당수가 해군제독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무엇보다 일본이 두 나라를 통치하는 방식이 달랐던 원인으로는 한국과 대만의 서로 다른 정치·사회 체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 이전 한국은 독자적인 정치지배체제가 존재했고, 사회에서도 양반이라는 지배계층이 존재했습니다. 이에 비해 대만은 독자적인 정치체제가 없었고, 사회면에서 볼 때는 귀족과 같은 지배층이 아주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을 지배한 일본은 아주 강압적으로 종전의 정치·사회체제를 없애고 식민통치체제를 이식하려 했던 것이고, 대만의 경우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통치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같은 식민지였지만 일본의 두 나라에 대한 통치에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통치기를 기억하거나 바라보는 두 나라 국민의 생각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에 중화민국정부의 대만 접수 초기에 발생한 2.28 사건과 그 후로 이어지는 백색공포시대를 경험하면서, 대만인(본성인)들의 생각 속에는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생각이 확산된 것이다. 여기에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은 네덜란드 집권부터 천수이볜 집권 이전의 모든 정부를 ‘외래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역사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 속에서 일본의 대만통치기는 대만의 근대화를 가져온 상대적으로 좋은 시절이었으며, 많은 대만인(본성인)들에게 마음속 깊이 ‘일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겼다.
이 연장선상에서 일본통치기에 태어나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받은 세대에 속하는 리덩후이 전 총통은 일본 잡지와의 회견에서 ‘황국 2등 신민이었던 대만인으로서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일본 전범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2010년에는 방송에 출연하여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는 원래 일본 땅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했다.
대만인(본성인) 입장에서 볼 때 기록에 남아있는 약 400년 동안 네덜란드·스페인, 정성공, 청, 일본 그리고 현재의 중화민국까지는 피지배의 역사로,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와 정치체제를 세운 경험이 없다. 지배자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순종적인 자세를 취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를 두고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에서는 “대만인들의 사고 속에는 피해의식과 패배주의가 잠재되어 있다.”며, “대만인은 오랜 외세의 지배를 겪으면서 지배자를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배자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역사를 보면 ‘범중국의 일부’로서 대만을 바라보고, 자신들 혹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중국에서 항일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외성인들은 반일 정서면에서 한국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다만 이런 시각을 가진 대만인(중화민국 국민)은 상대적 소수이며, 본성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리고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대만 사람들에겐 ‘반중이므로 친일’이라는 ‘반중친일’ 정서도 한몫한다.
<메리의 생각>
내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면 한국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이 다른 점이 궁금해서 아마존에서 일본 역사 교과서를 사서 한국 역사 교과서와 비교해 보기도 하였다. 같은 역사적 사실인데도 용어, 해석이 조금씩 달랐다. 프랑스와 독일처럼 한국과 일본도 공동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우리를 단순한 생물학적 단위에서 사회적 단위로 변화시킨다. 역사의 혹은 역사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인 상속물이 아니라 그가 성장해 온 집단에서 사회적으로 취득된 것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환경도 인간의 사유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참고도서>
최창근,도서출판리수,2013,『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대만의 묘한 친일정서”,p189
E, H, Carr 지음, 김택현 교수 옮김, 까치, 2015, 『역사란 무엇인가』,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