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아도 악의를 품고 살지는 말아야지
남자는 와인이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관용어가 있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급 빈티지 와인처럼 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나는 위스키라고 말하겠다.
1989년, 내가 태어난 해에 완경(完經)이라는 어휘가 등장했다. 제3대 국립중앙의료원장이 처음 사용한 단어. 안명옥 원장은 여성이 더 이상 생리하지 않는 현상을 두고, 한자 ‘닫을 폐’를 쓴 폐경(閉經)이 아닌 월경을 완료했다는 의미의 ‘완경’으로 명명했다.
그로부터 35년이 흘렀다. 이제는 뉴스나 기사에서도 ‘완경’이란 표현을 볼 수 있다. 포털에 댓글을 배설하는 일부 XY들이 ‘페미들의 정신승리’라고 이죽거린다 한들, 우리 XX들도 ‘아, 어쨌든 승리는 승리라는 거네.’ 하며 귀를 후비고 마는 여유가 생겼다. 위스키가 숙성을 위해 오크통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듯 폐경이 완경으로 바뀔 동안 여성들도 굳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가치는 남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XX들이 있는데, ‘남자가 와인이면 여자는 위스키’라고 부러 얘기한 의미를 곱씹어보길 희망한다.
지금부터는 XX들에게 추천하고 싶기도 한, 위스키 예찬을 해보려고 한다.
미성년 시절, 술로 인해 인간이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목격했던 나는 술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대체 술은 어떤 작용을 일으키기에 사람을 돌발적으로 만드는가. 나는 성인이 돼서도 절대 술을 먹지 않으리. 이 다짐은 대학에 가서도 이어졌다. 군기 잡기로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절대적인 신념과 같던 ‘금주 캠페인’을 깬 것은 허무하게도 돈이었다.
나의 첫술은 위스키. 위스키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처음 술을 마시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무지하여 용감했다. 술에 시옷자도 모르면서, 시급이 높다는 이유로 ‘난 여기서 일해야겠다.’고 찾아간 것이다. 스물한 살이라서 가능했다. 엄마에게는 설거지를 담당한다고 말했지만, 주방 이모는 따로 있었다. 바텐더가 된 나는 손님을 응대해야 했다고, 술을 설명하기 위해선 맛을 알아야 했다. 선배들로부터 술을 배웠다.
처음 마셨을 때 무척 떨었던 기억이 난다. 도수가 40도가 넘은 술. 마시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면 어떡하지? 선배들 앞에서 구토를 할까 봐 걱정이 됐다. 비위가 약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금만 냄새가 역하면 곧바로 속이 안 좋아졌다. 나만 아는 정도지만 손을 떨며 긴장했다. 그런데 눈 딱 감고 한 잔을 마신 후에는… 뭔가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서.’
등줄기가 오싹했다. 외할아버지의 DNA가 2대에 걸쳐 내게도 전해진 건가 싶어서.
다행히 윗세대와 나에겐 차이점이 있었다. 절제능력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후 자발적 금주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애주가, 흡연자의 밀집구역인 방송국에서도 나는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담배도 안 피우는 작가’였다. 만약 동료와 선후배들이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예, 사실은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내린 금주령을 깬 건 2018년, 서른이 되어서였다. 그해 영화 「소공녀」가 개봉했다. 나는 스크린을 통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위스키와 재회할 수 있었다. 돈 없고 집 없는 주인공 미소. 점점 궁핍해지는 환경 속에서 미소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물질적 가치는 황당하게도 ‘술’이었다. 미소는 나처럼 글렌피딕 15년을 좋아했고, 없는 살림에도 위스키 바에 들렀다. 주류시장에서 위스키를 사면 훨씬 저렴하게 술을 마실 수 있지만 미소는 꼭 바에 들러 술 한 잔을 마셨다. 어떤 이가 보기에는 낭비, 다른 어떤 이가 보기에는 낭만일 수 있다. 나는 낭만에 한 표를 던졌다.
이후 영화 촬영장소인 서울 서촌 칵테일 바 ‘코블러’에 방문했다. 실제 코블러는 메뉴판이 없는 곳. 손님이 취향을 말하면 바텐더가 맞춤형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게 특징이었다. 나는 위스키 베이스에 체리 리큐르가 들어가지만 달지 않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블랙체리 가니쉬를 올린 칵테일을 시원하게 한 입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반응이 민감했다. 혈액이 순환되는 느낌을 받았다. 과장 같겠지만 실은 과학에 가깝다. 위스키는 혈액 속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적당량을 섭취하면, 뇌의 활동이 빨라져 혈액순환이 원활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날의 술은 내게 ‘호의’였다. 서른 살의 나는 주 7일을 일하고 있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자진해서 주말 방송까지 했지만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주 6일을 헬스장에 갔다. 2년 넘게 인터벌 러닝을 하면서도 ‘러너스 하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다. 건강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한 운동이 스트레스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열정을 과하게 쏟은 탓에 지금은 헬스장의 기부천사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심신에 피곤이 잔뜩 묻었던 날. 코블러의 달콤 씁쓸한 체리 칵테일은 피로를 사그라지게 했고, 두 번째 잔이었던 위스키는 내 안에 착한 마음을 깨어나게 했다. 나는 스코틀랜드의 맑은 강물로 만든 위스키를, 그중에서도 단일 증류소에서 제조되는 싱글몰트를, 그중에서도 ‘글렌피딕 15년’을 가장 좋아한다. 코로 맡은 향에선 화이트플로럴 계열 꽃냄새가 맡아진다. 그다음 소량을 입안에 머금고 혀를 굴리면 서양 배와 은은한 꿀향이 어우러져 샤-하게 퍼진다. 피니쉬에 느껴지는 바닐라와 스카치 버터향마저 혀 위를 토슈즈로 사뿐히 터치하듯 지나간다. 바디감이 가벼워 첫 잔으로 제격인 셰리 캐스크 위스키, 글렌피딕 15년을 마시며 생각했다.
세상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아도 악의를 품고 살지는 말아야지.
행여 억울한 날에도 술 한 잔에 사르르 마음이 녹아질 수 있으니. 한 잔에 2만 원, 비싸지만 소공녀의 미소처럼 이 정도 사치는 해가며 살자고. 술의 절친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 같다. 친구와도 너무 거리가 가까울 때 문제가 생기듯이 술도 그러하다. 적당히 친숙할 것. 절대 취함을 목표로 마시면 안 될 것. 기분 좋게 마셨다 싶을 때, 딱 거기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를 즐기다가 그만둘 것.
주류 중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건 맥주지만, 찬 성질에 가까운 맥주는 한여름이 아니면 매력을 못 느꼈다. 배를 부르게 만드는 점도 탐탁지 않았다. 배는 술이 아닌 페어링 음식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희석식 소주는 달큰한 끝 맛이 취향이 아니었고, 와인은… 남자들의 술이라서 그런지 잘 맞는 주종은 아니었다. 아무리 정교하게 작업했다 해도 부산물이 들어가는 발효주는 체질상 맞지 않는 듯했다.
위스키를 여성에게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속도에 있다. 맥주가 ‘나는 아직 반도 안 먹었는데 ‘완뚝’을 끝내버린 팀장’ 같다면 위스키는 나만의 속도로 마실 수 있음이 용인되는 술이다. 샷(Shot)잔에 따른 뒤, 한 번에 털어 넣는 스트레이트 음용법이 있긴 하지만 그럴 거면 역전할머니가 주는 얼음맥주를 꿀떡꿀떡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위스키는 향수처럼 단계별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주종이다. 스모키한 피트 위스키는 퍼퓸 같고 프루티한 셰리 위스키는 오드 뚜왈렛 같다. 흔히 ‘언더 락’이라고 잘못 말하는 온 더 락(On the rock)잔에 얼음을 타서 마시는 방법도 있는데, 더 순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얼음으로 인해 온도가 내려가고 원액도 희석되면서 위스키 본연의 향, 오크통의 아로마향은 옅어지고 알코올 냄새가 더 짙어진 독한 맛이 난다.
나는 보통 물이나 얼음을 첨가하지 않고 원액 그대로를 즐기는 니트(Neat)로 위스키를 마시는 편이다. 글렌캐런 잔을 손바닥을 감싸서 체온을 전달한 다음, 잔을 흔드는 스웰링(Swirling)으로 향긋함을 느낀다. 그다음 천천히 음미한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위스키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듯 장기를 이리저리 건드리며 하강한다. 곧이어 종착지에 다다르면 뱃속 온도가 올라간다. 기분 좋은 싸함이 느껴지는 이때, 솔트캐러멜 맛 부샤드 초콜릿까지 녹여 삼키면 풍미가 배로 증폭된다. 뱃속이 따끈해지면서 안정감이 든다. 러시아 사람들이 독주에 강해진 이유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 온기를 많은 사람들이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단, 선천적으로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나머지 주류인들이라면 그중 위스키를 아직 접해보지 않았다면, 한 번쯤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본 사람들과 같이 마셔보고도 싶다.
여자들의 술 위스키를.